시대적 배경

시대적 배경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시(23:00~01:00)에 한성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미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인해 연산군이 재위하던 중에 무오사화(1498년 :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 세력들에 의해 사화를 입은 사건)와 갑자사화(1504년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에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가 일어나 정계의 혼란이 깊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물리치고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옹립한 뒤 왕을 폐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년)이 일어났다. 중종은 개혁정치를 단행하고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중용하였지만 신진사류세력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성향과 개혁성, 그리고 훈구·공신세력들과의 깊은 반목으로 인해 또 다시 기묘사화(1519년, 남곤 ·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가 축출된 사건)를 일으키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순신고택 - 해군사관학교 이순신고택 - 해군사관학교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仁宗)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8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인종의 아우인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또 다시 조정은 혼란에 빠져 들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외척세력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 세력은 대윤(大尹) 세력을 배척하였고 을사사화(1545년 : 윤임 일파인 대윤이 반역음모죄 등으로 몰려 사림세력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왕조가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ㆍ경제적으로 혼란을 맞아 점차 쇠퇴해가는 기미를 보일 무렵, 이순신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이 태어나기 전 반세기 동안은 피로 물들었던 처참한 네 번의 사화가 있었지만, 유성룡(柳成龍)만은 이순신이 인재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즉, 유성룡은 조선의 인물을 논한 《서애집(西厓集)》에서 “우리나라의 인물은 세종(世宗) 때가 제일이요, 성종(成宗) 때가 그 다음이요, 중종(中宗) 때가 또 그 다음인데, 중종 기묘(己卯) 때의 인물들은 문체가 빛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건국 초기의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기풍과 순수한 기상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예로부터 ‘정치가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시골에서 인물이 나고, 정치가 안정된 후에는 한성에서 인물이 난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이를 인용한다면, 이순신이 출생할 때만 하더라도 정치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시대였으나 이순신만은 예외적으로 한성에서 나라의 인재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장(行狀)>에는 이순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머니 변씨가 이순신을 낳을 때 시아버지인 백록이 꿈에 나타나 “그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 그가 태어났을 때 점쟁이가 찾아와 “이 아이는 50세가 되면 북방의 대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순신의 영웅적 자질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고금을 통하여 재앙과 난리가 있을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난리를 평정시킬 사람을 탄생시킨다.

이 말은 숙종(肅宗) 때의 영의정이었던 이이명(李離命 : 1658~1722)의 말이다. 현재의 정치적인 혼란과 앞으로 다가오게 될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의 민족적 시련을 앞두고 하늘은 이순신이란 영웅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구할 길을 열어두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