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급제

무과급제

무예를 연마한지 7년이 지나고, 이순신은 28세가 되던 해인 선조 5년(1572년) 8월 가을에 훈련원(訓練院)에서 주관하는 별과(別科)에 응시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첫 무과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 과목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가지를 꺾은 뒤 껍질을 벗겨 상처를 묶고 끝까지 시험을 완수했다. 비록 과거에는 낙방하였지만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이순신은 32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무과는 처음 치렀던 별과와는 다른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식년무과(式年武科)였다. 당시 무과합격자는 모두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결코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지만 당시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체계적으로 기마술을 반복 훈련한 현직 군인들이었다. 따라서 보인 신분으로 사가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던 이순신으로서는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하겠다. 이는 장인 방진의 조력과 함께 그의 부단한 노력이 거둔 결실이라 하겠다.

특히 이순신은 무과의 시험과목 중에서 병서 강독시험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인다. 당시 시험관이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강독하게 하다 이순신에게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 하였으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하고 묻자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강목(『통감강목』)에도 ‘임자(壬子) 6월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다만 꾸며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무인들은 무예를 연마하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병법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던 터라 시험관은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잘 알 수 있느냐?”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이렇듯 병법에 조예가 깊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이순신표준영정

이순신이 급제한 때는 32살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대부분이 십 대에 성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조혼제도(早婚制度)가 성행했기 때문에 일찍 가정을 이루고 그만큼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빨리 갖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늦은 나이에 궁술ㆍ병법과 더불어 학문에까지 두루 능통하여 문무를 겸비한 대기만성형의 무인이 된 사실에서 그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