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

백의종군

백의종군은 조선시대에 중죄를 지은 무관에게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년에 두만강 북쪽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백의종군으로 참전했고, 이후 임진왜란 기간 중에 두 번째의 백의종군을 했다.
조선시대 무관에 대한 처벌이었던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전에는 이순신이 두 번 겪었던 백의종군은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이라는 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백의종군은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있는데, 1588년 1월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이 지휘한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상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육군박물관 소장)라는 제목의 기록화이다.
이 전투 기록화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 장수들 전체의 명단과 직책, 편제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순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참전 장수가 확인되고 있다.
이순신은 1차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4개월 뒤에 이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뒤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사면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2,700여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눠 전투를 수행했는데, 이순신은 해임되어 현직이 없었지만 ‘우위(右衛),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서 우위장이었던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 장수로 참전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종성부사였던 원균도 ‘우위, 일계원장(一繼援將)’으로서 참전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순신은 원균은 동급의 ‘장수’ 신분으로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백의종군은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차 백의종군
42세의 이순신은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만호(종4품)로 보직되었다. 또 이듬해인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둔도의 농토까지 관리하는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녹둔도의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갑청아(甲靑阿)·사송아(沙送阿) 등이 이끄는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공격했다. 치혈했던 이 전투에서 수호장 오형(吳亨)과 감독관 임경번(林景藩) 등이 전사를 하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끝까지 분전하여 적장과 적군의 목 3개를 베었으며, 이운룡(李暈龍)과 함께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혀있던 백성 60여 명을 구출해냈다.
이일은 이 전투의 피해가 전날 이순신의 원군요청을 거부한 자신의 잘못과 연관되어 책임추궁과 처벌이 내려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일은 이순신을 북병영으로 소환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으나, 이순신은 상부의 적절치 못한 조치내용을 거론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일은 아군측의 피해만을 기록하여 조정에 거짓장계를 올렸다. 잘못된 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결국 지난날의 공적을 참작하여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우화열장으로 참전하여 거점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복권되었다.
2차 백의종군
일본군 첩자였던 요시라의 간계에 빠진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나가 가등청정의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워낙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작전을 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왜군 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원균의 모함까지 이어져 조정은 이순신에게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박탈하고 투옥할 것을 결정했다.
1597년 2월 26일 조정은 이순신을 압송하여 의금부에 구속시켰다. 이순신이 파직된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셋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죄로 빠뜨린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선조는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하며 ‘스스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국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여러 차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鄭琢)신구차(伸救箚)를 올려 그를 위해 적극 변호하였다. 이 상소문은 1,298자로 이루어진 명문으로서, 조정은 이 신구차로 인해 이순신에게 극형만은 면하게 한 뒤 백의종군을 명했다.
伸救箚

우의정 정탁(鄭琢)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남두어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실상은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호생하시는 덕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리에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 벼슬을 받아 죄수를 문초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얼추 죄인들이 한 번 심문을 거치고는 그대로 상하여 쓰러져 버리고 마는 자가 많아 설사 좀 더 밝혀 줄 만한 사정을 가진 경우가 있더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라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적이 이를 늘 민망스레 여겨왔습니다.
이제 모(순신)가 이미 한 번 형벌을 겪었는데, 만일 또 형벌을 하게 되면, 무서운 문초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여 혹시 성상의 호생하시는 본의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바입니다.
저 임진년에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로서 성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들도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자가 적었으며, 또 조정의 명령조차 사방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적에 모(순신)는 일어나 수군을 거느리고 원균과 더불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인심이 겨우 얼마쯤 생기를 얻게 되고, 의사들도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습니다.
조정에서도 이를 아름다히 여기고 높은 작위를 주면서 통제사의 이름까지 내렸던 것이 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던 첫 무렵에 뛰쳐나가 앞장서는 용기로는 원균에게 미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기도 한 바는 그렇다고 하겠으나, 원균이 거느린 배들은 마침 그때에 조정의 지휘를 그릇 되이 받들어 많이 침몰된 것이니만큼, 만일 모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더라면 장한 형세를 갖추어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대장이라 나갈만함을 보고서야 나가므로, 시기를 잃지 않고 수군의 이름을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는 용기는 원균이 가진 바라 하겠지만, 끝내 적세를 꺾어버린 공로로는 원균에게 양보할 점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한 공이 없지 않았는데, 조정의 은전은 온통 모에게만 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할 일입니다.
원균은 수군을 다루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며, 일에 달아나 피하지 않고 마구 찌르기를 잘하는 만큼, 두 장군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적을 물리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 서로 매양 어전에서 이런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두 장군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원균을 다시 쓰지 않고, 오로지 모만 머물러 두어 수군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모는 과연 적을 방어하는 일에 능란하여 휘하 용사들이 모두 즐겁게 쓰이므로 군사들을 잃지 않고 그 당당한 위세가 옛날과 같으므로,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겁내는 까닭도 혹시 거기에 있지 않나 하거니와, 그가 변방을 진압함에 공로가 있음을 대강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는 모가 한 번 공로는 세운 뒤에 다시는 내세울 만한 공로가 별로 없다고 하여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적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댓 해 안에 명나라 장수들이 화친을 주장하고, 일본을 신하국으로 봉하려는 일까지 생기어 우리나라 장수들은 그 틈에서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모가 다시 더 힘쓰지 못한 것도 실상은 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왜적들이 또 다시 쳐들어옴에 있어 모가 미처 손쓰지 못한 것도 무슨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 장수들이 한 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는 제 마음대로 못하는 바,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그때 곧 전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며, 또 바다의 풍세가 좋았는지 아닌지, 뱃길도 편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군들이 각기 담당이라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은 이미 도체찰사의 장계에도 밝혀진 바도 있거니와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정이 또한 그랬던 것인 만큼 모든 책임을 모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난 장계 가운데 쓰인 사실이 허망함에 가까우므로 괴상하기는 하지만, 아마 그것은 아랫사람들의 과장된 말들을 얻어들은 것 같으며, 그 속에 정확하지 못한 것들이 들어 있지나 않은가 여기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신으로서는 자못 풀어 볼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난리가 일어났던 첫 무렵에 공로를 적어 올린 장계가 낱낱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남의 공로를 탐내어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그로써 죄를 다스린다 하면 모인들 또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을 빼고는 저와 남이 상대할 적에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자가 적고,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잘못되는 일이 많으므로, 윗사람이 그 저지른 일의 크고 작음을 자세히 살펴서 경중을 따져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장수된 자는 군사와 백성들의 운명을 맡은 이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사람이라, 그들의 소중함이 이와 같으므로 예로부터 제왕들이 국방 책임을 맡기고 은전과 신의를 특별히 보여 큰 무엇이 있지 않으면 간곡히 보호하고 안전케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니, 큰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이나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막아내는 것과 가장 관계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 못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게다가 사리를 살펴 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저 감정을 품은 원균 같은 사람까지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며, 안팎의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해이해질까봐 그게 실상 걱정스럽고 위태한 일이며, 부질없이 적들만 다행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일개 모의 죽음은 실로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계되는 것은 가볍지 않은 만큼 어찌 걱정할 만한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날에도 장수는 갈지 않고 마침내 큰 공을 세우게 했던 바, 진나라 목공이 맹명 장군에게 한 일과 같은 것이 실로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신은 구태여 먼데 사실을 따오고자 아니하고 다만 성상께서 하신 가까운 사실로써 말할지라도, 박명실이 한 때의 명장인데 일찍 국법에 위촉되었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었더니, 얼마 안되어 충청도에 사변이 일어나 기축년(1589년) 때보다 더한 바 있었는데, 명실이 나가 큰 변을 평정시켜 나라에 공로를 세운 것이야말로 허물을 용서하고 일을 할 수 있게 한 보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모는 사형을 받을 만한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모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 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상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려 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면, 성상의 난리를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 됨이 어찌 옅다고만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