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해전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부산포해전(연전연승)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경상좌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일본군의 침략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후 원균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군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상으로 출전한 것은 1592년 5월 4일이었다. 전라좌수군의 출전이 늦어진 것은 ‘조정의 승낙 없이 야전지휘관 임의로 다른 도를 지원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출전하여 원균과 함께 적선을 격침시켜 북상하는 일본군의 군수지원을 어렵게 하라’는 조정의 승낙을 받고 출전했을 때에는 일본 육군은 이미 평양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후 이순신은 임진년에 4차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을 격퇴하였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 · 전라좌도 · 전라우도 수군의 연합함대였으나 실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었다. 1차 출동에서 옥포해전 등, 2차 출동에서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3차 출동에서 한산대첩으로 일본 수군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다.
7월 상순에 일본군이 견내량에 집결하기 시작한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였다. 이후 견내량이 전투를 하기에 불리한 곳임을 판단하고, 적의 함대를 외양으로 유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뱃머리를 180도로 돌려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펼쳤다. 마침내 적선 73척 중에서 7척은 싸우기도 전에 미리 도망쳤고 66척은 바다 속에 가라앉거나 불탔다.
십경도에 있는 부산포해전 삽화 모습 십경도5-부산포해전

적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육지로 도망쳤다가 배를 가르고 자살한 장수도 있었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4차 출동에서는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일본군의 해상병참선을 차단ㆍ봉쇄하고 조선의 군사 잠재력 동원 기반인 호남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 기도를 분쇄하였다.
조선 수군이 이렇듯 승리한 데에는 지세와 조류를 잘 알고 있고 일본 선박에 비해 함선이 크고 견고하고 기동력이 컸으며 천· 지· 현· 황자총통 등의 화포, 신기전, 화전 등 우세한 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승리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이순신이 있다. 그는 전략 전술과 용병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선두에서 지휘하다 총탄에 맞을 정도로 솔선수범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 수군의 연승으로 일본군은 바다로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진군하던 일본 육군도 그 기세가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견내량 서쪽바다를 엿보지 않게 되자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길목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