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효성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충무공의 효성

이순신이 건원보 권관으로 오랑캐를 토벌할 때 고향 아산에서는 아버지 이정이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산에서 함경도까지는 길이 멀고 교통이 불편하던 때라 돌아가신지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부친의 부음을 듣고, 그날로 길을 떠나 고향으로 바삐 돌아왔다.
또한 초계 변씨(草溪卞氏) 수림(守琳)의 딸이었던 충무공의 어머니는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 이순신은 어머님을 여수 본영의 가까운 곳으로 피난 와 있게 했는데, 거기가 바로 지금의 전남 여천군 쌍봉면 웅천리(일명 곰내 古音川)이다.
이순신이 어머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반가워하고 몇 날만 소식이 막히면 걱정하던 마음은 일기에 구구절절 나타나있다. 병신년 윤8월 12일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을 찾아뵈었더니 백발이 무수한 채 나를 보시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몇 날 더 보전하시기가 어려울 것 같다. 눈물을 머금고 손을 꼬옥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십경도에 있는 이순신장군과 어머지가 담소를 나누는 삽화 모습 십경도7-충무공의 효성

그때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천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어 그리로 가는 길이었으며 그로부터 전남 일대를 돌던 길에 10월 30일 다시 어머님을 찾아뵙고 여수 본영으로 모시고 와서 7일에 수연상을 차려 장병들과 함께 종일 즐겁게 해 드리고 10일에 어머님을 떠나 밤새도록 노를 저어 한산진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이순신이 어머님과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지금까지 이순신의 글로 전하는 것 중에서 가장 눈물겨운 것은 이순신이 진중에 머무르고 있던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 재상에게 “어머님을 가 뵈옵도록 몇 날의 휴가를 주십사”고 청하는 편지인데 그 내용의 곡진함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저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올해 여든 하나이옵니다. 얼마 전 어머님께서 하인 편에 글월을 적어 보내셨는데, “늙은 몸에 병이 나날이 더해가니 앞날인들 얼마되랴. 죽기전에 네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하셨더이다. 남이 들어도 눈물날 말씀이거늘 하물며 그 어머님의 자식 된 사람이야 어떠하오리까. 그 기별 듣고는 가슴 더욱 산란할 뿐, 다른 일엔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해전이 거의 없는 이 겨울에 가 뵈옵지 못하면 봄이 되어 방비하기에 바쁘게 되어 도저히 진을 떠나기 어려운 것인 즉 각하께서는 이 애틋한 사정을 살피시어 몇 날만 말미를 주셔서, 배를 타고 가 한번 뵈올 수 있게 해주신다면 늙으신 어머님의 마음에 적이 위로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 사이에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어찌 허락을 받았다 하여 감히 중대한 나라의 일을 그르치게야 하오리까.

비록 짤막한 편지이지만 그 속에는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과 책임감, 그리고 지극한 효성이 모두 한꺼번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같이 체찰사에게 몇 날의 휴가를 청했던 것을 보면, 이순신이 얼마나 스스로 규율을 엄격히 지키던 분이었던가를 알 수 있거니와, 앞에 말한 병인년 10월7일, 여수 본영에서 어머님의 수연상을 차려 드린 것은 체찰사에게 편지를 보낸 뒤 마지막으로 한일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정유년 4월 11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새벽에 꿈이 산란하여 이루다 말하기 어렵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를 했다. 또 아들 열에게도 이야기 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 취한 듯, 미친 듯, 겁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고,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흐른다.

실은, 이순신의 어머님은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 소식을 듣고 고음천을 떠나 서해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배 위에서 4월 11일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그 꿈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하였던가를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해암 바닷가에 와서 어머님의 시신(屍身)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