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몸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죄인의 몸

1596년에 4년간을 끌어오던 강화협상이 깨어지자, 일본군은 다음해 1월에 가토오 및 고니시 등을 동원하여 재침략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먼저 조선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으나, 이순신과의 정면대결은 오히려 저들에게 불리하고 참패를 면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새로운 간사한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조정의 당쟁과 원균과 이순신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하려 하였다.
고니시는 그의 부하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으로 보내어 밀서를 전달하고, “가토오의 부대가 모일(某日)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해상에서 맞아 싸워 달라.”는 정보를 제공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밀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왜적의 간계임을 간파한 나머지, 척후선을 보내어 정탐케 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오가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에 앞서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원균의 활동이 급진전하여 김응남 일당들을 시켜 조정회의에서 이순신을 비방하게 했다. 또한 요시라의 간계는 김응남 등의 서인(西人)들에게 비방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어, 그해 2월 26일 이순신은 공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는 이변을 맞게 되었다.
십경도에 있는 죄인의 몸이 된 이순신장군 삽화 모습 십경도8-죄인의 몸

서울로 압송된 공은 사형처분을 받을 뻔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청원으로 4월 1일 간신히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옥에 풀려나온 공은 뒤늦게야 홀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6월에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또 다시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낸지 한 달이 지난 7월 15일 이순신의 후임자였던 원균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전 함대를 잃고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원균의 연합함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권율은 이순신에게 명하여 조선 수군의 뒷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몸으로써 수군 재건의 중대 임무를 맡아 남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패전의 원인과 일본 수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칠천량해전에서 탈출했던 12척의 전선을 찾아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