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정신

충효정신

이순신이 관직에 오르고 전사하기까지 보여준 충의(忠義)의 모습은 어느 하나를 꼽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행적들 곳곳에 남아있다. 그것은 전쟁 전후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관되었던, 또 평범한 개인이 갖는 단순한 관념을 뛰어넘는 초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였던 충무(忠武)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인으로서의 국가에 충성하고자 하는 기개와 사명감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이순신이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가 근무하는 동안 숙소에는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으며 남은 양식은 반드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병마절도사가 이순신에게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을 때에도 이순신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며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모습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충사상(忠思想)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전라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로 근무하던 때,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이순신의 이러한 공사에 대한 분명한 태도는 성박을 감복시켰다.

이순신의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는 고행을 통해 더욱더 두드러진다.
녹둔도의 둔전관으로 있을 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하여 그들을 격퇴시켰고,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허위 고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했다.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이었지만 이순신은 이를 준수하였고 그것을 묵묵히 감수했었다.

또한 이순신이 종전의 해전을 연전연승으로 이끌며 전세를 역전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중앙으로 압송돼 투옥된 채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순신은항변으로 다른 사람을 연관시키거나 조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후 정탁의 상소로 인해 죽음 직전에 풀려나온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승전의 포상은 고사하고 조정과 임금을 업신여기고 전쟁에 태만한 죄로 모진 백의종군의 치욕과 고행을 수행해야 했던 이순신은 그것들을 묵묵히 감내해 나갔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부당한 처벌을 인내와 침묵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유는 오직 전란에서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의 일념 때문이었다. 이는 충 사상의 절정이자,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충성심의 극치 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은 조선 최대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효심을 지닌 아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부모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때문에 부양의 의무를 해야 할 대상이기 전에 삶의 본질이자 이유가 되었다.
이순신이 남긴 일기 곳곳에는 가족 관련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전체 일수의 1/5을 차지하는 327일분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기사가 100여 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내용이 전쟁 상황으로 인해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아픔과 깊은 그리움, 불효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 의식의 표현이다.

이순신은 건원보의 권관으로 근무하던 39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임지가 멀고 험했던 까닭에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부음을 듣게 된다. 평소 이순신을 아꼈던 우찬성 정언신이 이순신이 상중의 고통으로 인해 몸을 사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서두르지 말고 성복(成服)을 하고 상주의 차림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이순신은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간 연후에야 성복을 하고 3년 상을 치렀다.
특히 일찍이 부친과 두 형을 여위었던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은 더욱 각별하였다. 그는 전란 중에도 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하였으며 노환으로 인한 병세를 걱정하였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당시 진주 등지에 있었던 체찰사 이원익에게 올린 보고서는 그의 지극한 효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글에는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아들의 지극한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후 1596년 10월 7일에 수연(壽宴)을 베풀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심정을 다소나마 풀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향한 효성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두 번째 백의종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28일간 옥중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뒤, 정탁의 상소 등으로 인하여 석방되었고 다시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그후 그가 백의종군의 몸으로 합천ㆍ초계에 있는 권율의 휘하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어머니는 여수에서 아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배를 타고 아산 고향으로 올라가던 도중에 서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83세의 일기로 배위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머니가 별세한 날인 4월 11일, “새벽에 꿈이 산란하여 이루다 말하기 어렵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를 했다. 또 아들 열에게도 이야기 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 취한 듯, 미친 듯,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고,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흐른다.”라고 비보를 접하기 전의 어머니를 향한 걱정의 마음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이후 이순신은 곧 종을 바닷가로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오게 했다. 이튿날에는 안흥에서 어머니가 불편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나가 마중해 오도록 보냈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은 이틀 뒤인 13일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그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은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룰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더구나 금부도사는 길을 가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전란 속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죄인의 신분이 되는 고된 상황에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이순신을 깊은 상심에 빠지게 했다. 더욱이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이 전장으로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하며 그로 인한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어머니를 잃은 상황에서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그의 효성은 충과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극한 효도와 더불어 국가에 충성하는 것 역시 하나로 보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조국을 향한 사랑과 전장에서 자신까지도 희생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승화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