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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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의종군 행적
난중일기로 보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행적!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1597년 4월 11일(신미, 5월 26일)

정유년 5월(1597년 5월)

정유년 5월(1597년 5월)
1597년 5월 1일(신묘, 6월 15일) 비오다. 신 사과가 머물러서 이야기했다.
1597년 5월 2일(임진, 6월 16일) 저녁나절에 개이다.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마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순찰사(박홍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진흥국이 좌영에서 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말했다. 이형복ㆍ신홍수도 왔다. 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다고 한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1597년 5월 3일(계사, 6월 17일) 맑다. 이기남이 와서 봤다. 둘째 아들 울(蔚)을 열(䓲)로 이름을 고쳤다. ‘열’자는 소리는 ‘기쁠 열(悅)’과 같으며,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이다. 저녁나절에 강소작지가 와 보고서 곡했다. 오후 네 시쯤에 비가 뿌렸다. 저녁에 부사가 와서 봤다.
1597년 5월 4일(갑오, 6월 18일) 비오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참으랴!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릴 뿐이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 정사준이 오고, 이수원도 왔다.
1597년 5월 5일(을미, 6월 19일) 맑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병들이 군무 이탈하여 반역질을 하니 장차 일이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단오인데 땅의 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고 어머니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지내니, 무슨 죄로 이런 보답을 받는고!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누나.
1597년 5월 6일(병신, 6월 20일) 맑다.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부찰사(한효순)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이라 하며 조리한다고 했다. 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1597년 5월 7일(정유, 6월 21일) 맑다.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가 와서 미투리 한 켤레를 바쳤다.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재삼 간절히 받으라고 하므로 값을 쳐 주어서 보냈다. 송대기ㆍ유몽길이 와서 만났다. 서산군수(안괄)도 한산도에서 왔다. 이원룡은 수영에서 돌아왔다.
1597년 5월 8일(무술, 6월 22일) 맑다. 아침에 중 수인이 밥지을 중 두우를 데리고 왔다. 조종(趙琮)이 이름을 연(堧)으로 고치고는 와서 봤다.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했다. 이는 곧 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1597년 5월 9일(기해, 6월 23일) 흐리다. 아침에 이형립이 와서 봤다. 순천급제 강승훈이 응모해 왔다.
1597년 5월 10일(경자, 6월 24일) 궂은비가 오다가 저녁나절에 많은 비가 오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들여왔다. 부찰사도 조문하는 글을 보냈다. 녹도만호 송여종도 위문품을 보내왔다.
1597년 5월 11일(신축, 6월 25일) 맑다. 전 광양현감 김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었다. 순천에 왔던 길에 와서 봤다. 부찰사가 순천부에 도착했다. 정사립과 양정언이 전하기를 “부찰사가 와서 만나 보자”고 하는데, 내 몸이 불편하여 만나 보지 못했다.
1597년 5월 12일(임인, 6월 26일) 맑다. 이원룡을 보내어 부찰사에게 문안했다. 부찰사는 또 김덕린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찰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1597년 5월 13일(계묘, 6월 27일) 맑다. 어제밤에 부찰사의 말이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감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했더라”고 한다. 순천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왔다. 너무 미안하다.
1597년 5월 14일(갑진, 6월 28일)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는 부유(순천시 주암면 장촌리)로 향했다. 정사준ㆍ정사립ㆍ양정언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길을 떠나 송치(솔티 : 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밑에 이르러 말을 쉬게 했다. 운봉의 박롱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순천시 황전면과 구례 사이의 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1597년 5월 15일(을사, 6월 29일) 개이다. 비오다 하다. 구례현감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1597년 5월 16일(병오, 6월 30일) 맑다. 저녁에 남원의 탐후인이 돌아와서 고하되,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거쳐 이 구례현에 들어와 며칠 묵은 뒤에 진주로 갈 것이다”고 했다.
1597년 5월 17일(정미, 7월 1일) 맑다. 남원 탐후인이 와서 고하되, “원수(권율)가 운봉 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을 영접하는 일로 완산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내 여기 온 것이 헛걸음이라 괴롭고 괴롭구나.
1597년 5월 18일(무신, 7월 2일)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다. 김종려 영감이 남원에서 와서 봤다. 충청수영 영리 이엽이 한산도에서 왔기로 집안 편지를 부쳤다.
1597년 5월 19일(기유, 7월 3일) 맑다. 체찰사가 이 구례현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미안해서 동문 바깥 장세호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구례현감 이원춘이 와서 봤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1597년 5월 20일(경술, 7월 4일) 맑다. 첨지 김경로가 와서 봤다. 체찰사 이원익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군관 이지각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다”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저녁에 마땅히 가서 뵙겠다”고 하였다. 어두울 무렵 가서 뵈오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조용히 일을 의논하고 나올 때 남 종사(從事)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1597년 5월 21일(신해, 7월 5일) 맑다. 박천 유해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한산도로 가 공을 세우겠다고 한다.
1597년 5월 22일(임자, 7월 6일) 맑다. 박천 유해가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전라ㆍ경상 두 수사와 가리포첨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저녁나절에 체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구례현으로 들어오고, 배흥립 영감도 왔다고 하니 그간의 정회를 풀 수 있겠다. 다행이다. 배흥립 동지와 구례현감 이원춘이 와서 봤다.
1597년 5월 23일(계축, 7월 7일) 아침에 정사룡ㆍ이사순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내일 초계로 간다고 했더니, 체찰사가 모은 쌀 두 섬을 보내 주기에 이를 성 밖 주인 집으로 보냈다.
1597년 5월 24일(갑인, 7월 8일) 맑다. 아침에 광양의 고언선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도리가 없으니 본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대강 그려서 보냈다.
1597년 5월 25일(을묘, 7월 9일) 비오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려다가 비에 막혀 가지 않다.
1597년 5월 26일(병진, 7월 10일) 종일 많은 비가 오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막 떠나려 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이 왔다. 잠시 서로 마주보고는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쏟아진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이정란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했다. 김덕령의 아우 김덕린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로 청하여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1597년 5월 27일(정사, 7월 11일) 흐렸다가 개이다. 저녁나절에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 최춘룡의 집에 이르렀다. 유기룡이 와서 봤다.
1597년 5월 28일(무오, 7월 12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서로 만나 보는 것을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1597년 5월 29일(기미, 7월 13일) 흐리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