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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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보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행적!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1597년 4월 11일(신미, 5월 26일)

정유년 6월(1597년 6월)

정유년 6월(1597년 6월)
1597년 6월 1일(경신, 7월 14일) 비오다.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말을 쉬었다. 저물녘에 단성(진주 접경지역) 땅 박호원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기는 하나 잠자리가 좋지 못하여 겨우겨우 밤을 지냈다.
1597년 6월 2일(신유, 7월 15일) 비오다 개이다 하다. 일찍 떠나 단계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삼가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산성으로 이미 가버렸기에 빈 관사에서 잤다.
1597년 6월 3일(임술, 7월 16일) 비오다. 비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그대로 묵었다.
1597년 6월 4일(계해, 7월 17일) 맑다. 일찍 떠나려는데, 삼가현감(신효업)이 문안의 글을 보내면서 노자까지 보내왔다. 합천 땅에 이르러 말을 쉬고, 5리쯤 가니 길이 쌍 갈래이다. 한 길은 곧바로 합천군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또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쯤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바라보였다.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개를 끼고 넘어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겠다.
1597년 6월 5일(갑자, 7월 18일) 맑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급히 달려왔다. 곧 그를 불러 이야기했다. 식사를 한 뒤에 중군 이덕필도 달려왔으므로 옛 이야기를 했다. 조금 있으니 심준이 와서 보았다. 저녁에 이승서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이 도피했던 일을 말했다.
1597년 6월 6일(을축, 7월 19일) 맑다. 모여곡 주인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ㆍ문익신이 와서 봤다. 주인집이 과부집이라 곧 다른 집으로 옮겼다.
1597년 6월 7일(병인, 7월 20일) 맑다.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와 유홍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
1597년 6월 8일(정묘, 7월 21일) 맑다. 오후에 원수(권율)가 진에 오므로 나는 곧 나가 보고, 원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원수가 박성의 써 올린 글의 초고를 보여 주는데, 박성이 원수의 처사가 허술한 데가 많다고 진술하니, “원수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아 체찰사(이원익) 앞으로 글을 올렸다”고 했다. 저물어서 돌아왔다. 몸이 불편하므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1597년 6월 9일(무진, 7월 22일) 궂은비 오다. 저녁나절에 정상명을 원수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1597년 6월 10일(기사, 7월 23일) 맑다. 원수의 종사관이 삼척사람 홍연해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좀 늦게 와서 보겠다고 한다. 홍연해는 홍견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고우 서철이 합천 땅에 사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봤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보고,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탄스러움과 당면한 토벌ㆍ방비에 관해 허술한 것 등을 말했다.
1597년 6월 11일(경오, 7월 24일) 맑다. 명나라 차관 경략군문(唐差官經軍門) 이문경(李文卿)이 와서 보므로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엊저녁에 종사관과 이야기할 때 변흥백의 종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오서 전하므로 어머니의 영연이 평안한 줄은 알겠으나, 쓰라린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다만 변흥백이 나를 만나볼 일로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갔다고 하니 참으로 한이 된다. 변흥백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록 신음했다.
1597년 6월 12일(신미, 7월 25일) 맑다. 종 경과 종 인을 한산도 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ㆍ충청수사(최호)ㆍ경상수사(배설)ㆍ가리포첨사(이응표)ㆍ녹도만호(송여종)ㆍ여도만호(김인영)ㆍ사도첨사(황세득), 동지 배흥립 조방장 김완, 거제현령(안위)ㆍ영등포만호(조계종)ㆍ남해현감(박대남)ㆍ하동현감(신진)ㆍ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했다. 느지막이 승장 처영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므로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갔다고 했다. 어떤 일인지 몰랐는데 원수(권율)에게 가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했다. 복병군을 보내어 길을 막고 적에게 위세를 뽐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1597년 6월 13일(임신, 7월 26일) 맑다. 병마사의 우후 김자헌이 와서 봤다. 한 시간이나 넘도록 서로 이야기했다.
1597년 6월 14일(계유, 7월 27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다. 이른 아침에 이희남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니 영연과 위 아래 사람들이 두루두루 무사하다”고 한다.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이희남이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 갔다.
1597년 6월 15일(갑술, 7월 28일) 맑다.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어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군관을 보내어,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전한다. 나도 뒤를 따라 가서 큰 냇가에 이르러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로 정상명을 보내어 병이라고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1597년 6월 16일(을해, 7월 29일) 맑다.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이희남이 편지를 보냈는데, “병마사가 보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 열은 정상명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고 왔다. 변광조가 와서 봤다.
1597년 6월 17일(병자, 7월 30일) 흐리되 비는 안 오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 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하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려고는 아니하고, 오직 안골포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여,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개 딴 마음을 품고 있을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가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원수에게 이희남과 변존서ㆍ윤선각 등에게 공문을 띠워 독촉하여 오게 했다. 올 때에 종사관 황여일을 만나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임시로 사는 집으로 돌아와 이희남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1597년 6월 18일(정축, 7월 31일) 흐리되 비는 안 오다. 종사관 황여일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명나라 사람 섭성이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찍이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적병 십만 명이 벌써 대마도(沙自麻 : 쓰시마)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ㆍ대구 등지로 옮기어 안동으로 갈 것이다”고 했다. 저물 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사복 정상명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간다”고 하였다.
1597년 6월 19일(무인, 8월 1일) 새벽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원수와 종사관 황여일이 공무를 보고 있었다.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 통제사(원균)의 하는 일이 말이 아니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겠소? 질질 끌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고 했다. 나는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오정 때에 우수영 관리 변덕기ㆍ변덕장과 늙어 제대한 변경완과 나이 열여덟인 변경남이 와서 봤다. 진사 이신길의 아들인 진사 이일장도 왔다.
1597년 6월 20일(기묘, 8월 2일) 종일 비오다. 서철ㆍ윤감ㆍ문익신ㆍ문보ㆍ변유 등이 와서 봤다.
1597년 6월 21일(경진, 8월 3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영덕현령 배진경이 와서 보고, 좌도의 일을 많이 전했다. 종사관 황여일이 문안을 보냈다. 저녁에 변존서ㆍ윤선각이 들어와서 밤까지 이야기했다.
1597년 6월 22일(신사, 8월 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국(무ㆍ두부ㆍ다시마ㆍ고기를 맑은 장국에 끓인 국)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기는 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저녁나절에 이희남이 들어왔다. 이선손이 와서 봤다.
1597년 6월 23일(임오, 8월 5일) 비오다. 아침에 불화살[火箭]을 다시 다듬었다. 저녁나절에 우병마사(김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크고 작은 환도(環刀)를 보냈다. 나굉의 아들 나재흥이 그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봤다. 또 쪼들리는 데도 노자까지 보내어 주니 미안스럽다.
1597년 6월 24일(계미, 8월 6일) 새벽에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무밭을 갈고 씨부침하는 일의 감독관으로 이원룡ㆍ이희남ㆍ정상명ㆍ문임수 등을 정하여 보냈다. 생원 안극가가 와서 보고 시국 이야기를 했다. 합천군수가 조언형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1597년 6월 25일(갑신, 8월 7일) 맑다. 다시 무씨를 부침하도록 명령했다.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보고 군사를 토론했다. 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다. 보성군수 안홍국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놀라워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한 놈의 적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1597년 6월 26일(을유, 8월 8일) 맑다. 중군장 이덕필과 변홍달ㆍ심준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아래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하며, 장사날은 7월 27일이나 8월 4일 중에서 잡는다고 한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찌 다 말하랴!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이원익)에게, “아산의 이방과 충주의 이희남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곁으로 피해 있다”고 말하여, 체찰사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성하여 보냈다.
1597년 6월 27일(병술, 8월 9일) 맑다. 어응린ㆍ박진삼이 와서 봤다. 이희남과 이방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1597년 6월 28일(정해, 8월 10일) 맑다.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ㆍ홍대방이 와서 봤다. 초계 아전의 편지에,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고 하였다.
1597년 6월 29일(무자, 8월 11일) 맑다. 이희남ㆍ이방 등이 돌아왔다. 중군장 이덕필이 와서 유격 심유경을 잡아가는데, 총병관 양원이 삼가에 이르러 꽁꽁 묶어 보내더라고 전했다.
1597년 6월 30일(기축, 8월 12일) 맑다. 흥양의 신여량ㆍ신제운 등이 와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