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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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보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행적!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1597년 4월 11일(신미, 5월 26일)

정유년 7월(1597년 7월)

정유년 7월(1597년 7월)
1597년 7월 1일(경인, 8월 13일)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이 날이 인종이 제사날인데, 종사관 황여일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1597년 7월 2일(신묘, 8월 14일) 맑다.
1597년 7월 3일(임진, 8월 15일) 맑다. 정읍의 군사 이양ㆍ최언환ㆍ건손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킬 일로 보내왔다. 합천군수 오운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오후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좌병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1597년 7월 4일(계사, 8월 16일) 맑다. 종사관 황여일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했다. 이방과 유황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1597년 7월 5일(갑오, 8월 17일) 비오다. 변존서가 마흘방으로 갔다.
1597년 7월 6일(을미, 8월 18일) 맑다. 변존서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안각 형제도 변흥백을 따라 왔다.
1597년 7월 7일(병신, 8월 19일) 맑다. 의령현감 김전이 고령에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1597년 7월 8일(정유, 8월 20일) 맑다. 집 주인 이어해와 최태보가 와서 봤다.
1597년 7월 9일(무술, 8월 21일) 맑다.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 잤다.
1597년 7월 10일(기해, 8월 22일) 맑다. 열과 변존서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 새기를 기다리다가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1597년 7월 11일(경자, 8월 23일) 맑다. 변홍달ㆍ임중형이 와서 봤다.
1597년 7월 12일(신축, 8월 24일) 방응원ㆍ현응진ㆍ홍우공ㆍ임영립 등이 박명현이 있는 곳에서 왔다.
1597년 7월 13일(임인, 8월 25일) 맑다.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전마를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ㆍ 조신옥ㆍ홍대방이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1597년 7월 14일(계묘, 8월 26일) 맑다. 전마를 몰고 올일로 정상명을 남해로 보냈다. 방응원ㆍ윤선각ㆍ현응진ㆍ홍우공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우공은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놀랍다. 종사관 황여일은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의 편지를 보이는데, “초이레 왜선 오백 여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아흐레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종사관 황여일에게 달려가서 상의하였다.
1597년 7월 15일(갑진, 8월 27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중군 이덕필이 와서 우리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1597년 7월 16일(을사, 8월 28일)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사집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5일에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 왔다가 7일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니,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내어 불 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천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살육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게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마저 이와 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고, 더욱이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1597년 7월 17일(병오, 8월 29일) 비오다. 이희남을 종사관 황여일에게 보내어 세남의 말을 전했다.
1597년 7월 18일(정미, 8월 30일) 맑다. 새벽에 이덕필ㆍ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는데,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며 승낙하였다. 나는 송대립ㆍ유황ㆍ윤선각ㆍ방응원ㆍ현응진ㆍ임영립ㆍ이원룡ㆍ이희남ㆍ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1597년 7월 19일(무신, 8월 31일) 비오다. 단성의 동산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에서 잤다.
1597년 7월 20일(기유, 9월 1일) 종일 비오다. 단성현감이 와서 봤다. 오정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에 이르니, 진주 목사가 와서 봤다. 굴동(옥종면 문암리)의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1597년 7월 21일(경술, 9월 2일)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본업에 많이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이 적을 보고 먼저 달아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함께 이야기 했다. 오전 세 시가 지나도록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1597년 7월 22일(신해, 9월 3일)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날이 늦어서 남해현감 박대남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1597년 7월 23일(임자, 9월 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부치어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리)에 일르러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도 왔다.
1597년 7월 24일(계축, 9월 5일) 비오다. 한치겸ㆍ이안인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홍훈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이 정개 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조방장 배경남이 와서 봤다.
1597년 7월 25일(갑인, 9월 6일) 맑다. 종사관 황여일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배수립과 이곳 주인 이홍훈이 와서 봤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사람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전했다.
1597년 7월 26일(을묘, 9월 7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전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옥종면 문암리)으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과 진주목사와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1597년 7월 27일(병진, 9월 8일) 종일 비오다.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하동군 수곡면 원계리)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1597년 7월 28일(정사, 9월 9일) 비오다. 이희량이 와서 봤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 및 진주목사와 소촌찰방 이시경이 와서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했다.
1597년 7월 29일(무오, 9월 10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다. 탄식할 일이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와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