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지역

  • 백의종군
  • 백의종군로
날짜별 백의종군로 장소
1597년 6월 1일 6월 2일 7월 19일
산청 단성 산청 단성 산청 단성
산청지역은 6월 1일 충무공이 비가 오는데도 하동 현청을 떠나 청수역에서 말을 쉬고 저녁에 단성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여 불편한 가운데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일찍 떠나 단계천 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를 거쳐 단성으로 왔는데, 비가 오는 가운데 단성의 동산 산성에 올라 형세를 살피고 단성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산청에서는 6월 1일 단성의 박호원의 농사짓는 집에서 1박을 하고, 6월 2일 단계천 변에서는 아침식사를, 다시 7월 19일 동산산성에 올라 형세를 살피고 단성 현청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백의종군로

주요 지점으로는 1)단성 박호원의 농사 짓는 집 2)단계천 변 3)동산산성 4)단성현청이 있다.

단성 박호원의 농사 짓는 집 - 6월 1일 투숙한 곳

정유년(1597) 6월 1일에 하동읍성을 출발하여 산청군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집으로 이동했다.

충무공 일행은 점심 나절에 하동군 옥종면 청수리 앞 개울가에서 쉬고 덕천강을 끼고 난 길을 따라 산청군 단성면 창촌리 금만 마을에서 산길을 들러 단성면 길리 마을을 거쳐 현 단성면 남사마을에 이르게 되는 데 청수에서의 거리가 40리 가량 되는 길을 여름 날씨 반나절에 행군하였으니 저물어서 도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호원은 밀양(密陽)박씨로 자는 선초(善初),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다. 박이(朴苡)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55년에 함경남도평사에 올랐으며, 이후에 수찬(修撰) ·헌납(獻納) ·교리(校理)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으로 있을 때 이조정랑 홍천민(洪天民)이 그를 이조정랑에 추천했으나 명종은 평안도에 흉년이 심하여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 하여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파견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사재(박호원의 집) 전경 이사재(박호원의 집)

명종 후반에 임꺽정을 두목으로 하는 도적들이 극성하자 이들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이들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565년 장령(掌令)이 되고, 이후에 승지직을 주로 거쳤으며, 1576년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박호원의 외가가 남사마을이었다. 어머니 장수황씨가 친정에 와서 불의의 질병으로 이곳에서 작고하니 부득이 이 마을에 장사를 하게 되었다. 박호원이 관직에 있으면서 어머니 묘소를 보살 필 수가 없어 전답을 마련하고 농막을 지어서 종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역소개-남사마을

충무공이 머물렀던 단성 남사마을은 산골이면서도 비교적 넓은 분지를 이룬 지형인데 마을 한가운데를 시내(남사현 사수)가 흐르고 있어 남쪽은 진주군 사월면이고 북쪽은 단성현 사월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사마을은 천왕봉에서 일백여리를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가 니구산인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이다. 마을은 당산이 숫룡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가 되어 서로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인 쌍룡교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마을 터를 배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의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도 않고 우물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

단성 남사마을에서는 밀양박씨, 성주이씨, 진양 하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사마을 전경 전경 모습 남사마을 전경

수많은 선비들이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여 많은 수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은 빛내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고려 말 정당문학을 지낸 통정 강회백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날 유숙지는 단성 땅과 진주접경 일대인 이사재로 추정하고 있어 이 입구에 백의종군로 기념석이 서있다.

단계천 변 - 6월 2일 아침밥 지어 먹은 곳

충무공이 아침 일찍 출발하여 30리길을 달려서 아침밥을 지어먹은 단계천 변은 현재 충무공 백의종군을 기념하여 1997년 이 충무공 추모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이곳은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단계현의 소재지로 문물이 번성한 곳이었다. 지금도 한옥 마을로 이름이 나서 지방도 1006호선을 따라 지마고개를 넘어서면 즐비한 기와집들이 눈앞에 들어온다. 도 민속자료 4호인 단계 박씨 고가 문화재 자료 120호인 권씨 고가 등이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단계천변 이충무공 추모공원 모습 단계천변 이충무공 추모공원
단계로 들어오는 입구의 지마(止馬)고개는 타고오던 말을 멈추라는 뜻으로 양반고을에 들어오면서 예를 갖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단계 이충무공 추모비 지마고개를 넘어서서 50미터쯤 내려가다 우측으로 가면 충무공이 백의종군 중 머물러 아침밥을 지어먹은 단계천 변이 나온다.

충무공이 삼가로 갈 때 단계천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고 단계천을 건너 현재 두곡마을에서 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디실재를 넘어 삼가로 갔다고 마을 주민들은 증언한다.

지금은 디실재를 넘어 삼가로 갈 수 없으므로 충무공 추모 공원에서 단계마을-월평마을 -연산마을 -삼가면 덕진 마을-삼가면 사무소- 합천 도원수 진이 있었던 매실 마을로 가야 한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단계 이충무공 추모비 모습 단계 이충무공 추모비

동산산성

충무공이 7월 18일 합천 도원수 진에서 남해안 전세를 살피기 위해 출발해서 삼가현에서 유숙하고 이튿날인 7월 19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단성현으로 오는 도중 현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동산성에 올라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이 동산성은 일명 백마산성이라 하는데 주위가 2,795척으로(약800m)삼면이 자연절벽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상부위는 평탄한데 군량미 창고와 못이 하나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오는 이 성은 진주성과 인접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을 것을 주위 환경이나 자연 지형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요새이다.
임진왜란에 왜병이 침공해 왔을 때에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오뉴월 염천에 물이 적어서 오래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위하고 있던 왜적은 이 점을 노리고 지구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루는 쾌청한 여름날 성안에 있는 지혜로운 장수가 말 한필을 몰아서 바위 끝에 세우고 쌀을 퍼서 말 등에 뿌리니 멀리서 보기에는 더운말을 찬물로 목욕시키는 것 같이 보였다. 포위망을 굳게 지키던 왜적이 험준한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면 아무런 승산이 없을 것임을 짐작하고 포위망을 풀어 퇴각하였는데, 이때 기갈이 심했던 성중의 사람과 말이 일시에 내달아 강물을 마시자 신안강(경호강)물이 세치나 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 후부터 산성의 이름을 백마산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동산산성 동산산성

단성현청 - 7월 19일 묵은 곳

충무공은 빗속에 산성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 강 건너에 있는 단성현청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단성현청은 지금 단성 초등학교로 이용되고 있으며 단성현청의 주춧돌이었다고 전해지는 초석이 옮겨져 운동장 가운데 오랜 수령의 나무터 둘레에 위치해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단성현청 단성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