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과 동래성의 싸움

임진왜란의 시작
  •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이 있기 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자

부산진성과 동래성의 싸움?

임진왜란의 첫 싸움을 알아보자.

일본 수군은 명나라로 진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조선을 명나라로 가는 가교[駕轎다리]로 만들기 위해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부산 앞 바다까지 침략해 왔다.
이런 상황인데도 조선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상황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였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592년 4월 13일 오전 8시경에 일본 수군은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을 출발하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1만 8,700명을 태운 700여 척의 전선이 부산포로 접근하였다.’

‘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부산 첨사 정발과 부하들이 화살을 쏘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맞서 몇 차례의 싸움 끝에 다음 날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 1592년 4월 15일 아침 일찍 부산진을 떠난 일본군은 8시부터 동래성 주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한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곽을 고치고, 전쟁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성안으로 피난 온 백성들과 동래성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으나 송상현도 전사하고 동래성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부산진 순절도 부산진 순절도
‘ 1592년 4월 중순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부산진성 함락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황급히 대책을 논의하여 일본군의 북상 저지에 나섰다.’

‘ 1592년 4월 25일 이러한 상황이 선조에게 보고되자 이일을 순변사[巡邊使조선시대에 왕명으로 군무(軍務)를 띠고 변경을 순찰하던 특사]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싸움에 패하자 이일은 말을 타고 혼자 도망쳤다.’

일본군은 경상도 지역을 휩쓸고 조선 관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파죽지세[破竹之勢대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 어가는 기세를 이르는 말]로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때 선조는 류성룡을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류성룡은 신립과 이일을 충주로 내려 보내 일본군이 충청도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 1592년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은 최후의 결전을 결심하고 전 병력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신립은 김여물 등과 함께 남한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동래부 순절도 동래부 순절도
우리나라 지도에 당시의 일본군 침략 과정을 표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