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의 위기 칠천량 해전

노량해전 이전의 상황
  • 연전연승을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하기까지의 과정과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괴멸될 위기에 처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깊이 되새겨 보자.

조선 수군의 위기 칠천량 해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배한 이유를 알아보자.
원균은 1597년 6월 18일 출전 이후로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전투를 치르고 별다른 전과도 없이 한산도 기지로 돌아왔다.
선조 임금은 원균에게 부산을 향해 출전하라는 명령을 계속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또 출전을 미루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다.
마침내 1597년 7월 5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안골포를 지나 7월 7일 다대포 해전에서 일본전선 8척을 불태우고 이 기세를 몰아 7월 9일 부산 앞바다까지 진출하여 일본 전선 1,000여 척과 조선 수군이 대결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기상악화로 전투도 못한 채 전선 20여 척을 잃고 절영도와 가덕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덕도에 머무는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부하 400여 명을 잃은 원균은 급하게 전선을 출항시켜 거제도의 칠천도에 도착했다. 칠천도는 견내량과 가까웠고 조금만 내려가면 수군 기지가 있는 한산도에 도달하게 되는 곳이었다.
칠천량 해전도 칠천량 해전도
그러나 원균은 전과 [戰果전투나 경기 따위에서 올린 성과]없이 귀환하기를 꺼려 칠천량 포구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597년 7월 15일 밤이었다. 일본군은 쾌속선 5,6척을 보내서 조선 전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리고 7월 16일 일본은 1,000여 척의 전선을 동원하여 공격을 해 왔다. 이 해전에는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적장 도도 다카도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등이 참전했다.
칠천량 해전 지도 칠천량 해전 지도
조선 수군을 지휘하고 있던 원균은 경상도 칠천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조선 전선의 대부분은 부서지고 수군은 전사를 하였다.
이 전투에서 추격을 당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원균과 그 일행은 경상남도 고성 추원포(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한편, 경상우수사 배설은 1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탈출하여 회령포(전남 장흥군 회진리)에 몸을 숨겼다. 훗날 이 전선은 조선수군 재건의 발판이 되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의 조선수군 지휘부는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거북선도 파괴되었다.
한산도 전진 기지를 접수한 일본은 그토록 염원하던 해상권을 쥐고 수륙병진정책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조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듯 했다.
칠천량 해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