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돌아갈 길을 찾는 일본진영

각 나라의 정세
  • 임진왜란 막바지에서 조선, 명, 일본은 각기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조선은 일본 의 침략에 큰 아픔을 겪고 있었으며, 파병 온 명군의 행패로 멍이 들어 있었다.
    종전을 앞둔 명나라와 일본의 속셈과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을 자세히 알아보자.

살아 돌아갈 길을 찾는 일본진영

일본군이 남해안을 따라 왜성을 쌓은 이유를 알아보자.

임진년에 발발한 왜란이 잠시 수그러지면서 강화회담으로 전진하다가 결렬되자 일본에서는 1597년 1월 15일 육군 11만 5,000명과 수군 7,200여 명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순천 왜성 그리고 조선에 남아있던 2만여 명과 합쳐서 14만 여 명의 군사를 편성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3월 중순까지 남해안을 침략한 일본군은 10월부터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백리에 왜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남해안 일대는 일본군 14만 1,500명이 머무르게 되었다.

순천 왜교성[예교성 이라고도 불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성에는 시마즈 요시히로 울산성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고장 남해에는 선소리 윤산 천남대에 많은 일본군들이 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었다.

순천 왜성 순천 왜성
남해읍 선소리를 찾아 일본 왜성의 흔적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