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의 전초전 왜교성 싸움

노량해전의 동기세
  • 임진왜란 막바지에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고 노량 해전의 원인과 이순신 장군의 사람됨을 살펴보자.

노량해전의 전초전 왜교성 싸움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교에 왜성을 쌓은 지리적인 이유를 생각해보자.
왜교성 앞 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크고 무거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마음대로 돌격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500여 척의 전선을 육지 깊숙한 신성포에 숨기고 수로에는 말뚝을 박아 조선 수군이 들어와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양쪽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아 대니 해상전투를 벌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무릅쓰고 1598년 10월 2일 조명연합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일본군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최후 발악으로 조명연합군은 피해가 늘어나기만 했다. 명나라 군사 800여 명과 조선의 사도 첨사 황세득이 전사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6일 사천성을 공격하던 중로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로군 제독 유정은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잃고 군사를 순천으로 철수시켜 버렸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로군은 전투를 끝내지도 못하고 10월 9일 고금도 본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왜교성 위치 왜교성 위치
판옥선 판옥선
조명연합수군이 왜교성 싸움에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