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과 난중일기로 본느 노량해전의 발단

문헌속의 노량해전
  • 지금까지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그 당시 문헌 에는 어떻게 노량해전을 기록했는지 알아보자.

실록과 난중일기로 보는 노량해전의 발단

선조실록 1598년 11월 7일
“지금 명나라 제독 유정이 다시 진군을 하려하니 관계된 바가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반드시 내가 직접 남쪽으로 내려가 그 뒤에서 계책을 통하고 서로 도와야 군량 수송과 군사 모집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장수의 마음과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물러나 있겠는가? 이 뜻을 알리어 모든 일에 미리 준비하여 빠른 시일에 내려가게 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여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난중일기 1598년 11월 8일
“명나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하루 내내 술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였다. 바로 나갔더니,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간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습니다.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읍시다.’ 하였다”

위 일기의 내용은 명나라 제독 유정이 도독 진린 몰래 고니시와 휴전협정을 마쳤던 것을 후에 전공을 탐내는 도독 진린이 알게 되어 이순신 장군에게 연락을 취하였던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9일
“조명연합 전선은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고니시가 철수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여수를 거쳐 광양만으로 전선을 이동하여 왜교성에서 4.5㎞ 떨어진 유도에 11월 11일 도착하였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0일
“순천 왜교성 고니시군은 제독 유정과 휴전협정으로 철수 준비를 완료하였다. 사천 시마즈군과 남해 소오군은 왜성을 버리고 창선도에 집결하여 순천의 고니시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성의 자치바나군도 거제도로 이동하여 철수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1일
“도원수 권율은 선조 임금께 고하기를 제독 유정이 비밀리에 고니시와 모의하여 강화(휴전)하려고 하고 있다고 했다. 저들(고니시군)을 속여 소굴에서 나오게 하여 바다 건너는 것을 기다려 협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을 구차하게 수습하려는 계책이라고 매우 통한스럽다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2일
“고니시군은 제독 유정과의 협상을 믿고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선발대로 함선 10척을 보냈다. 그러나 광양만 안의 묘도 부근에서 조선 전선에 발각되어 진로가 차단되었고 격퇴 당하였다. 순천의 고니시는 이 사실을 알고 펄쩍 뛰면서 명나라 인질 40명 중 2명의 팔을 잘라 제독 유정에게 보내며 크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제독 유정은 또 다시 나를 속이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제독의 군사와 일전으로 승패를 결할 것이다. 제독 유정은 바라건데 화를 도독 진린에게 구하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전달하였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4일
순천 왜성지를 빠져 나갈 방법을 찾고 있던 고니시는 어떤 방법으로든 명나라군을 설득시키고 뇌물로써 해결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제독 유정의 말대로 도독 진린에게 줄 뇌물을 갖고 갔으나, 도독 진린은 한 술 더 떠 전쟁의 성과물인 수급 2천을 주면 철군을 허용하겠다고 하였다. 도독 진린은 서로 피를 흘리는 접전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수급을 받아 전공을 세우겠다는 것인데 그 수급은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 아니겠는가!
이 소식을 듣고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더욱 결심을 하면서 한 명의 적이라도 살려서 돌 려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독 진린은 고니시 군사 4명을 태운 척후선 한 척을 몰래 나가도록 허용했지만 실패하였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5일
고니시는 또 다시 말과 창, 칼을 도독 진린에게 바치며 군사는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며 길을 빌려서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도독 진린은 많은 뇌물을 받았으므로 고니시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먼저 나(이순신 장군)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니시는 나도 도독 진린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여 많은 뇌물을 싣고 나를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는 제독 유정이나 도독 진린과는 달리 “이것만으로 쓰고 남을 지경이나 이런 것은 그냥 갖고 돌아가라! 화해의 일에 대하여서는 이 사람이 관여할 바가 못된다.”고 단호히 뇌물을 거절했다.
고니시는 자신의 뜻이 거절되자 도독 진린을 부추겨 뜻을 이루려고 뇌물을 도독 진린을 통하여 전하러 오자, 나는“장수는 화해를 말하여서는 아니 되오며 원수는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소이다. 이 점은 명나라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가 많은 군사들인데 이제 대인께서는 도리어 그 죄를 용서하고 화해하시렵니까?” 도독 진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6일
조명연합전선의 복병장 소계남과 조효열은 일본 전선이 남해로부터 군량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포획을 하여 배와 군량을 연합전선 쪽으로 가져오는데 중간에서 도독 진린 전선에게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고니시는 선발대로 전선 10여 척을 보냈으나 나의 공격을 받고 모두 죽게 되었다. 이에 고니시는 다시 나에게 선물을 바치려 하자
“원수의 적 무리가 어찌 감히 이같이 외람한고!”
하고 크게 꾸짖었다.
고니시는 왜교성의 위급함을 여러 곳에 있는 일본전선 측에 알려 도망갈 궁리를 하였다. 그래서 또다시 도독 진린에게 청하였지만 도독 진린은 나에게 무안을 당하였거늘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냐 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멈추지 않고 도독 진린에게 수없이 찾아가 뇌물을 바치며 간곡히 부탁을 하므로 고니시의 애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도독 진린은 고니시군의 연락선을 성 밖으로 나가게 허락하였다.
이에 일본군 연락선은 창선도에 집결하고 있는 사천 시마즈군과 남해 소오군에게 순천 왜교성의 위급함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한 거제의 다치바나군과 부산의 다카하시군에게도 연락하여 지원을 받아 건장하고 힘센 정규 병사들만으로 일본군은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본군의 전투준비 상황을 들은 나는 머지않아 왜교성의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적선들이 이곳으로 몰려 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나는 군관 송희립과 해남 현감 유형의 생각 과도 같아 여기 그대로 있으면 양옆에서 적탄을 받게 되므로 불리하게 되니 진열을 큰 바다 가운데로 옮기고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 전투 작전계획을 도독 진린에게 알리자 도독 진린은 자기의 무지와 실수가 이러한 상황까지 오게 하였다고 자책하였지만 노량해전은 임박해 오고 있었다.
난중일기로 보는 명나라 장수 제독 유정과 도독 진린, 이순신 장군의 다른 점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