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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배경

이순신고택 [해군사관학교]이순신고택 [해군사관학교]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시(23:00~01:00)에 한성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미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인해 연산군이 재위하던 중에 무오사화(1498년 :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 세력들에 의해 사화를 입은 사건)와 갑자사화(1504년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에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가 일어나 정계의 혼란이 깊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물리치고자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옹립한 뒤 왕을 폐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년)이 일어났다.

중종은 개혁정치를 단행하고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중용하였지만 신진사류세력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성향과 개혁성, 그리고 훈구·공신세력들과의 깊은 반목으로 인해 또 다시 기묘사화(1519년, 남곤·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가 축출된 사건)를 일으키게 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仁宗)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8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인종의 아우인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또 다시 조정은 혼란에 빠져 들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외척세력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 세력은 대윤(大尹) 세력을 배척하였고 을사사화(1545년 : 윤임 일파인 대윤이 반역음모죄 등으로 몰려 사림세력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왕조가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경제적으로 혼란을 맞아 점차 쇠퇴해가는 기미를 보일 무렵, 이순신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이 태어나기 전 반세기 동안은 피로 물들었던 처참한 네 번의 사화가 있었지만, 유성룡(柳成龍)만은 이순신이 인재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즉, 유성룡은 조선의 인물을 논한 《서애집(西厓集)》에서 “우리나라의 인물은 세종(世宗) 때가 제일이요, 성종(成宗) 때가 그 다음이요, 중종(中宗) 때가 또 그 다음인데, 중종 기묘(己卯) 때의 인물들은 문체가 빛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건국 초기의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기풍과 순수한 기상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예로부터 ‘정치가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시골에서 인물이 나고, 정치가 안정된 후에는 한성에서 인물이 난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데 이를 인용한다면, 이순신이 출생할 때만 하더라도 정치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시대였으나 이순신만은 예외적으로 한성에서 나라의 인재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장(行狀)>에는 이순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머니 변씨가 이순신을 낳을 때 시아버지인 백록이 꿈에 나타나 “그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 그가 태어났을 때 점쟁이가 찾아와 “이 아이는 50세가 되면 북방의 대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순신의 영웅적 자질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고금을 통하여 재앙과 난리가 있을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난리를 평정시킬 사람을 탄생시킨다.

이 말은 숙종(肅宗) 때의 영의정이었던 이이명(李離命 : 1658~1722)의 말이다. 현재의 정치적인 혼란과 앞으로 다가오게 될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의 민족적 시련을 앞두고 하늘은 이순신이란 영웅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구할 길을 열어두었던 것이었다.

유년시절

한성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못했으므로 집안이 가난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어려워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뱀밭마을(白岩里)로 이사를 가게 되고, 이곳이 이순신의 고향처럼 되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에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놀았으며 그 중에서도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 때마다 아이들은 이순신을 대장으로 올려 세웠다.
그리고 언제나 활과 화살을 즐겨 차고 다녔다. 마을에서 어른들이라 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면, 곧장 바른 말을 했기 때문에 어른들도 이순신을 어렵게 여겼다. 그만큼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녔던 것이다.

한편 한글판 《충무공행장》에는 《충무공전서》의 행장과 다른 소년시절의 일화 두 가지가 실려 있다.

여덟살 되어서 원두밭에 가 외(참외)를 달라 하니 외 임자 아니 주거늘, 공이 이미 돌아와 말을 타고 외밭에 가 달리시니 외 임자 무수히 빌어서 그치고 그 후는 공이 가시기만 하면 외를 마주 드리더라. 또 이웃집 소경아이가 와서 청하여 가로되, 아무 집에 동아를 많이 심었으니 가 따오자 하거늘, 공이 그 소경아이를 이끌고 두어 방위를 돌아 동아 연 집으로 가는 체하고 도로 소경의 집으로 와서‘이것이 그 집이라’하고 그 아이를 지붕 위에 올라 동아를 다 딴 후 공이 버리고 먼저 오신데, 소경의 어미가 동아를 따는 줄 알고 바삐 나와 보니 제 자식이 지붕 위에 오뚝하니 앉았더라.

위의 이야기는 이순신이 소년시절부터 보여 왔던 협기와 지기 싫어하는 성격 등을 잘 나타내 준다.
이후 이순신은 나이가 들면서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결코 소홀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대부 가문의 학풍에 따라 희신(羲臣)·요신(堯臣) 등 형제들과 함께 유학(儒學)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의 문학적 자질과 깊이는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그 밖의 여러 한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예연마

1565년 8월,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방진은 무관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역임한 후 은퇴하여 향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의 슬하에는 무남독녀만 있었다. 그는 무인으로서 호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자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는데, 이순신의 품성과 자질을 높게 평가하여 자기 딸과의 혼사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결혼 한 후에는 무관직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 붓을 던지고 2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리고 10년간 준비를 한 끝에 가까스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집안 사정은 타고난 무인의 기질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무인의 대접은 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문인의 소양이 더 필요했다.

결국 이순신은 20여 년간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쌓은 뒤에 10여 년간 자발적이고 치열한 노력을 통해서 무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 결과 이순신은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가진 무인이 되었다.

이순신의 무인적 자질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무과 급제한 직후 선영에 갔을 때 기울어진 석인상을 세웠던 일이 있다. 당시 선영의 석인상이 기울어져서 하인들 수십 명이 세우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자 이순신이 하인들을 물리치고 청포를 입은 채 등에 짊어지고 바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순신이 신체가 장대하고 본래 힘이 세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서 이순신은 힘이 장사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정신력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순신은 힘이 없어 보이는 선비같은 외모로 무인의 천부적인 신체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정신력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순신에 대해 강건한 무인이 아니라 단아한 선비의 외모를 가졌다고 한 유성룡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이 무예를 닦던 장소는 그가 사는 집 뒤에 위치한 방화산(芳華山)이나 집 앞의 나지막한 야산이었다고 한다. 활쏘기는 집 앞 은행나무 아래에서 야산을 향해서 쏘았고, 말타기는 방화산 꼭대기의 평평한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능선을 달렸다. 그가 무예를 익히던 곳에는 ‘궁터’(이순신이 활을 쏘던 곳)나 ‘치마장’(馳馬場, 이순신이 말을 타고 훈련을 하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궁터에서 ‘이순신은 임금이 있던 북쪽을 피해 남쪽을 향해서만 활을 쏘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무예를 익히는 데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절제하였으며 위엄을 갖추어 행동했던 것이다.

무과급제

무예를 연마한지 7년이 지나고, 이순신은 28세가 되던 해인 선조 5년(1572년) 8월 가을에 훈련원(訓練院)에서 주관하는 별과(別科)에 응시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첫 무과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 과목을 보던 중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가지를 꺾은 뒤 껍질을 벗겨 상처를 묶고 끝까지 시험을 완수했다. 비록 과거에는 낙방하였지만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이순신은 32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무과는 처음 치렀던 별과와는 다른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식년무과(式年武科)였다. 당시 무과합격자는 모두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결코 우수한 성적이 아니었지만 당시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체계적으로 기마술을 반복 훈련한 현직 군인들이었다. 따라서 보인 신분으로 사가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던 이순신으로서는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하겠다. 이는 장인 방진의 조력과 함께 그의 부단한 노력이 거둔 결실이라 하겠다.

특히 이순신은 무과의 시험과목 중에서 병서 강독시험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인다. 당시 시험관이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강독하게 하다 이순신에게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 하였으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하고 묻자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강목(『통감강목』)에도 ‘임자(壬子) 6월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다만 꾸며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무인들은 무예를 연마하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병법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던 터라 시험관은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잘 알 수 있느냐?"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이렇듯 병법에 조예가 깊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급제한 때는 32살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대부분이 십 대에 성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조혼제도(早婚制度)가 성행했기 때문에 일찍 가정을 이루고 그만큼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빨리 갖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늦은 나이에 궁술ㆍ병법과 더불어 학문에까지 두루 능통하여 문무를 겸비한 대기만성형의 무인이 된 사실에서 그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관직생활

동구비보 권관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이 처음 관리생활을 시작한 곳은 함경도에 있는 삼수(三水)이다. 삼수는 조선시대의 귀양지 중 1급에 해당하는 제주도 지역에 버금가는 가장 멀고 험한 벽지였다. 그러한 곳에 발령받은 그의 보직은 종9품인 동구비보(東仇非堡)의 권관(權管)이었다. 이 지역은 국경에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곳이어서 종종 여진족이 침범하기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권관으로서 그 지방에 보(:자그마한 요새)를 설치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수비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었다.

당시 함경감사(咸道監司 : 종2품)였던 이후백은 자신의 관할지역의 여러 진()을 순행하면서 훈련과 군기를 점검하였는데, 특히 변방의 각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장수들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리는 등 엄격하였다. 이렇듯 진영과 군기관리에 엄정한 감사였지만 이순신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이 권관으로 지휘하고 있는 동구비보가 여느 보()보다도 규율이 엄중하고 나무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감사를 맞아 이렇게 건의하기도 했다.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하여,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 말도 옳으나, 난들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림 없이 그러하겠는가.

이후백은 건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이순신의 실력과 더불어 동료들의 고충을 헤아릴 줄 아는 동료애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훈련원봉사

함경감사의 신임을 받으며 3년의 임기를 마친 이순신은 종8품의 한성 훈련원 봉사(奉事)로 승진되었다. 훈련원에서는 군사들의 인사· 시험· 훈련· 교육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순신은 인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훈련원에는 직속상관인 병조정랑(兵曹正郞 : 정5품) 서익(徐益)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았으며, 이율곡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 그가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해왔다. 자신의 친지 한 사람에 대하여 규정을 무시하고 참군(參軍 : 정7품)으로 올려달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규율에 어긋나는 처사였기 때문에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

아래 있는 자를 까닭 없이 끌어올리면 당연히 승진되어야 할 사람이 천거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당한 청탁이 거절당하자 서익은 상관으로서 부하인 이순신에게 앙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보고 들은 훈련원의 동료들은 모두 그것을 통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공명정대함과 인격은 종종 서익과 비교되곤 했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충돌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며 눈여겨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병조판서였던 김귀영(金貴榮)은 이순신의 인품을 높이 사고, 그를 자신의 서녀(첩의 딸)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으로서 어찌 권세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 제안마저도 거절하였다. 이에 김귀영도 노여움은커녕 오히려 그에 대해 더욱 더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승 말이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 죽은 데는 (문상을) 안 간다.’는 속담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지나친 아첨과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말처럼, 당시 사회는 세도가와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입신과 출세의 길을 찾고 세력을 형성하려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러한 부당한 권력욕에는 추호도 관심과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병조정랑을 비롯한 상관들의 밑에서 훈련원 봉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공명정대함을 펼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훈련원에 부임한지 8개월 만에 인사조처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봉사와 같은 일반적인 관리의 임기가 2년 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조치로 서익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충청병사 군관

이순신은 같은 해 10월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2품)의 군관(軍官)이 되어 충청도 병영이 있는 해미(海美)로 가게 된다. 해미는 원래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해미(海美)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방에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다. 당시 생활에 대해 《행장》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거처하는 방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고, 다만 옷과 이불뿐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반드시 남의 양식을 담당 병사에게 돌려주었는데, 병사들은 그의 철저함에 경의를 표하였다.

어느 날 병마절도사가 술에 취하여 이순신의 손을 잡고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다. 이순신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마절도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상관이라 하더라도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는 성격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발포 수군만호

1580년 6월, 이순신은 36살의 나이로 전라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 : 종4품)가 되었다. 지금까지 육지에서의 군관생활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수군의 지휘관을 맡게 된 것이었다.
당시 전라감사 손식(孫軾)은 이순신에 대한 잘못된 풍문을 이미 듣고 오해하였기에 그에게 벌을 주어 군기를 잡으려는 구실을 찾고 있었다. 하루는 순시 도중 능성(綾城)에 오르게 되자 이순신을 나오라 하여 《진설(陣說 : 조선시대 진법을 해설한 병서)》을 강독케 하였다. 이순신은 침착하고 조리 있게 설명을 마쳤다. 이에 감사는 다시 진을 치는 진도(陳圖)를 그리라 명하였다. 진도 역시 정확하게 그려내자, 손식은 그제야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이순신의 손을 잡으며 "내가 잘못하였소.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소."라고 말했다.
이후로 손식은 이순신에 대해 이전과 달리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하지만 이순신과 상관들의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 나무는 오래된 것으로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잡목이 아닙니다.

결국 성박은 자신의 뜻대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지 못했다.
얼마 후 성박의 뒤를 이어 이용이 새로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다. 그 역시 이순신에 대하여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용은 자기 관하의 5포(五浦 :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를 점검하였다. 다른 4개의 포구는 이탈자가 많은 반면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에는 겨우 3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용은 조정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이탈자만을 적어 장계를 올렸다. 이런 부당함에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했으며 이에 당황한 이용이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특히 이용은 전라감사와 함께 부하장수들의 성적과 실력을 평가할 때 5개의 포구 중 이순신을 가장 낮게 평가하였다. 당시 이순신보다 1살 연상이며 전라도 도사(都事)로 부임하고 있던 조헌(趙憲)은 이와 같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고 판단하고 항의했다.

듣건대, 이순신의 군사 다스리는 법이 우리 도에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장수들을 그의 아래에 둘지언정, 그를 도리어 나쁘게 평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조헌의 항의로 이순신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으며, 훗날 이용도 이순신의 충직함과 의로움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거듭된 상관과의 시련은 결국 이순신을 파직에 이르게 만들었다. 1582년 2월 변방의 군기물을 감찰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파견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지난 훈련원시절에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당했던 서익(徐益)이었다.
과거 훈련원 시절의 일을 두고 앙심을 품고 있었던 서익은 발포의 군기물 감찰에 대한 결과를 거짓으로 작성하여 군기가 부실하다고 보고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발포만호로 부임한지 18개월 만에 자리에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파직이 정당한 사유가 아닌 서익의 개인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훈련원 봉사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넉 달이 지난 1583년 5월, 이순신은 전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한성의 훈련원 봉사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사조치가 매우 불합리한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해 12월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 이순신을 알아보고 유성룡을 통해 만날 것을 청하였고, 유성룡 역시 이순신의 입신을 위해 그렇게 하길 권유하였지만 이순신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와 율곡은 같은 덕수이씨 문중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 만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아무리 같은 문중이라 하더라도 당시 군사와 무관의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수장인 이율곡을 만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처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훈련원 관직생활이 1년 2개월이 지날 즈음 예전에 상관이었던 이용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이순신을 군관으로 임명했다. 전일 이순신의 강직한 성격과 충실함을 높이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원보 권관

1583년(선조 16년) 10월, 이순신은 함경도의 경원에서 남쪽으로 40리쯤 떨어진 변방 건원보(乾源堡)의 권관으로 보직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경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고을로서 여진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수시로 백성들을 해치거나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곳은 과거 고려 때 명장이었던 윤관에 의해 여진족들이 정벌되기도 했었다.
이 지역에서 여진족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한 이순신은 계책을 이용하여 오랑캐들과 우두머리인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하였고, 미리 배치한 복병으로 그들을 모두 토벌하였다.<이충무공전서>의 <행록>에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이 부임하여 방책을 쓰는데, 유인작전으로써 울지내로 하여금 오랑캐를 데리고 오게 해놓고, 공은 복병을 풀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전과에 대해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큰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북병사(北兵使) 김우서가 자신과의 아무런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장계를 올려 반대함에 따라 포상은 취소되었다. 대신 이순신은 건원보에 있는 동안 임기가 끝나 참군(정7품)으로 승진이 되었다.
이순신이 오랑캐를 생포한 다음 날인 11월 15일, 그의 부친인 정()이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 1584년 1월에 전해졌다. 이순신을 아끼던 우찬성(右贊成) 정언신(鄭彦信)이 상중의 고통으로 그가 몸을 사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을 하고 상주의 차림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이순신은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간 연후에야 성복을 하고 3년 상을 치렀다. 그러나 거듭되는 여진의 변방 침입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그를 기용하기 위해 상중에도 탈상시기를 자주 물어왔다.

조산보만호와 녹둔도둔전관

탈상을 한 후 1586년 1월, 42세의 이순신은 궁중의 말과 수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사복시(司僕侍)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고,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 종4품)로 전근되었다.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는 오랑캐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로 이순신만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유성룡이 이순신을 조산보만호로 추천했다.
또 이듬해인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추천으로 녹둔도(鹿屯島)의 농토까지 관리하는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산보에서 동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섬이며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여울목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녹둔도에서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여진족의 갑청아(甲靑阿), 사송아(沙送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둔전의 울타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해왔다. 당시 요새 안에는 10여 명의 병사들만이 있었으며 나머지 병력은 모두 둔전의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붉은 모전(毛氈)을 입은 적병이 앞장 서 달려왔고 이순신은 유엽전(柳葉箭)으로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에 적들이 모두 놀라 겁을 먹고 달아났으며 이순신은 이운룡(李暈龍)과 함께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수호장인 오형(吳亨)과 감독관이었던 임경번(林景藩) 등이 전사를 하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조선군도 오랑캐 두목과 적군의 목 3개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투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와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이일이 조선 측의 피해만을 거론하며 이순신을 처벌하고자 했다. 이일의 거짓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지난날 그의 공적을 고려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 :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을 명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다음해 1월에 벌어진 여진과의 전투에서 그들의 거점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복권되었고, 그해 6월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갔다.

전라관찰사 군관으로부터 정읍현감

1589년 2월, 함경감사였던 이광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면서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지 7년 만에 다시 벼슬에 오른 것이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다시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으로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정읍현감에 부임하자마자 태인현(泰仁縣)의 현감까지 겸임하게 됐다. 이순신은 현감으로 봉직하게 되면서부터 요절한 형 희신·요신의 자식들과 모친을 부양했다. 당시 지방관리들이 식솔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것을 남솔(濫率)이라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순신은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들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거두었다.
한편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내던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의금부는 금부도사를 하여금 조대중의 집을 수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보냈던 편지도 함께 압수당했다.
마침 이순신이 차사원(差使員 :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보내던 직원)으로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그 금부도사와 주쳤다. 평소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금부도사는 행여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편지를 따로 빼내려 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그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것일 뿐이오. 이미 압수를 당하여 공물이 된 것을 사사로운 이유에서 빼낸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라고 하며 거절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개인의 이익 혹은 불이익 때문에 공무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였다.

전라좌수사

1590년 이순신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이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지나야 옮길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반대하였다. 다시 한 달 뒤인 8월에는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너무 빨리 진급을 시킨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2월, 조정은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로 임명했다가 부임하기 직전 다시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승진되어 정읍에서 곧장 임지로 부임하게 됐다.

이처럼 이순신이 급속히 진급하게 된 것은 조정의 국방강화에 따른 무관의 불차탁용(不次擢用 : 경력 순서를 따지지 않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당시 선조는 비변사에 명하여 각기 장수의 재목을 천거토록 하였는데,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추천했으며, 이에 따라 관리로서 정상적인 승진 순서를 뛰어 넘어 발탁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사간원)에서 2회에 걸쳐 이순신의 승진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지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선조의 강력한 의지 아래 이순신의 부임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전라좌수영의 편제에 속하는 5포(사도·방답 · 여도·녹도 · 발포)와 5관(순천 · 보성 · 낙안 · 광양 · 흥양)을 순시하면서 전선 · 무기 · 병사(兵舍) 등을 점검하고 미비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바로 이때에 임진왜란에서 수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거북선도 건조되었다.

진영을 점검하고 군비를 보강하는 한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군사들의 기강이었다. 이순신이 부임할 당시 휘하의 장졸들은 고된 근무와 훈련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개인의 전투력관리에도 소홀하였다. 때문에 그는 수영의 기강확립에 우선을 두고 군무에 태만한 관리와 군사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렸고, 각 포()와 진()의 지휘관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수시로 실시하여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순신은 각 포구와 진지의 성()과 보()를 돌아보며, 시설의 허술한 데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이를 보수하라고 지시하였다. 본영(本營)인 여수에도 연대(煙臺)와 성보(城堡) 쌓았는데, 좌수영의 방어시설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기까지 전문적인 수군 업무를 관장하였던 기간은 짧았다. 하지만 발포만호를 역임하면서 얻은 경험을 최대한 살려 남해안의 해상 지리를 면밀히 파악하였다. 또한 지형지물에 맞춰 수군배치를 재편해 나갔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에서의 첫 해전을 시작으로 임진년에 4차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을 격퇴하였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전라좌도·전라우도 수군의 연합함대였으나 실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었다. 1차 출동에서 옥포해전 등, 2차 출동에서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3차 출동에서 한산대첩으로 일본 수군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다. 이후 4차 출동에서는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일본군의 해상병참선을 차단·봉쇄하고 조선의 군사 잠재력 동원 기반인 호남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 기도를 분쇄함으로써 적의 조선 침략·정복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적기에 수행하였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3년에도 재차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에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겨우 죽음을 면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후임 원균이 7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이후 이순신은 "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도록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장계를 올린 후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나아가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을 펼쳐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를 통해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 철군하려 하였는데, 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11월 19일,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고, " 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다.(노량해전).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54세였다.

백의종군

백의종군은 조선시대에 중죄를 지은 무관에게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년에 두만강 북쪽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백의종군으로 참전했고, 이후 임진왜란 기간 중에 두 번째의 백의종군을 했다.
조선시대 무관에 대한 처벌이었던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전에는 이순신이 두 번 겪었던 백의종군은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이라는 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백의종군은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있는데, 1588년 1월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이 지휘한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상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육군박물관 소장)라는 제목의 기록화이다.
이 전투 기록화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 장수들 전체의 명단과 직책, 편제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순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참전 장수가 확인되고 있다.
이순신은 1차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4개월 뒤에 이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뒤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사면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2,700여 명의 군사를 셋으로 나눠 전투를 수행했는데, 이순신은 해임되어 현직이 없었지만 ‘우위(右衛),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서 우위장이었던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 장수로 참전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종성부사였던 원균도 ‘우위, 일계원장(一繼援將)’으로서 참전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순신은 원균은 동급의 ‘장수’ 신분으로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백의종군은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차 백의종군

42세의 이순신은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만호(종4품)로 보직되었다. 또 이듬해인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둔도의 농토까지 관리하는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녹둔도의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갑청아(甲靑阿)·사송아(沙送阿) 등이 이끄는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공격했다. 치혈했던 이 전투에서 수호장 오형(吳亨)과 감독관 임경번(林景藩) 등이 전사를 하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끝까지 분전하여 적장과 적군의 목 3개를 베었으며, 이운룡(李暈龍)과 함께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혀있던 백성 60여 명을 구출해냈다.
이일은 이 전투의 피해가 전날 이순신의 원군요청을 거부한 자신의 잘못과 연관되어 책임추궁과 처벌이 내려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일은 이순신을 북병영으로 소환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으나, 이순신은 상부의 적절치 못한 조치내용을 거론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일은 아군측의 피해만을 기록하여 조정에 거짓장계를 올렸다. 잘못된 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결국 지난날의 공적을 참작하여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우화열장으로 참전하여 거점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복권되었다.

2차 백의종군

일본군 첩자였던 요시라의 간계에 빠진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나가 가등청정의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워낙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작전을 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왜군 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원균의 모함까지 이어져 조정은 이순신에게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박탈하고 투옥할 것을 결정했다.
1597년 2월 26일 조정은 이순신을 압송하여 의금부에 구속시켰다. 이순신이 파직된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셋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죄로 빠뜨린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선조는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하며 ‘스스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국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여러 차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鄭琢)은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그를 위해 적극 변호하였다. 이 상소문은 1,298자로 이루어진 명문으로서, 조정은 이 신구차로 인해 이순신에게 극형만은 면하게 한 뒤 백의종군을 명했다.

伸救箚
우의정 정탁(鄭琢)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남두어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실상은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호생하시는 덕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리에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 벼슬을 받아 죄수를 문초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얼추 죄인들이 한 번 심문을 거치고는 그대로 상하여 쓰러져 버리고 마는 자가 많아 설사 좀 더 밝혀 줄 만한 사정을 가진 경우가 있더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라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적이 이를 늘 민망스레 여겨왔습니다.
이제 모(순신)가 이미 한 번 형벌을 겪었는데, 만일 또 형벌을 하게 되면, 무서운 문초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여 혹시 성상의 호생하시는 본의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바입니다.
저 임진년에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로서 성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들도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자가 적었으며, 또 조정의 명령조차 사방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적에 모(순신)는 일어나 수군을 거느리고 원균과 더불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인심이 겨우 얼마쯤 생기를 얻게 되고, 의사들도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습니다. 조정에서도 이를 아름다히 여기고 높은 작위를 주면서 통제사의 이름까지 내렸던 것이 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던 첫 무렵에 뛰쳐나가 앞장서는 용기로는 원균에게 미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기도 한 바는 그렇다고 하겠으나, 원균이 거느린 배들은 마침 그때에 조정의 지휘를 그릇 되이 받들어 많이 침몰된 것이니만큼, 만일 모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더라면 장한 형세를 갖추어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대장이라 나갈만함을 보고서야 나가므로, 시기를 잃지 않고 수군의 이름을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는 용기는 원균이 가진 바라 하겠지만, 끝내 적세를 꺾어버린 공로로는 원균에게 양보할 점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한 공이 없지 않았는데, 조정의 은전은 온통 모에게만 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할 일입니다.
원균은 수군을 다루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며, 일에 달아나 피하지 않고 마구 찌르기를 잘하는 만큼, 두 장군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적을 물리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 서로 매양 어전에서 이런 말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두 장군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원균을 다시 쓰지 않고, 오로지 모만 머물러 두어 수군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모는 과연 적을 방어하는 일에 능란하여 휘하 용사들이 모두 즐겁게 쓰이므로 군사들을 잃지 않고 그 당당한 위세가 옛날과 같으므로,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겁내는 까닭도 혹시 거기에 있지 않나 하거니와, 그가 변방을 진압함에 공로가 있음을 대강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는 모가 한 번 공로는 세운 뒤에 다시는 내세울 만한 공로가 별로 없다고 하여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적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댓 해 안에 명나라 장수들이 화친을 주장하고, 일본을 신하국으로 봉하려는 일까지 생기어 우리나라 장수들은 그 틈에서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모가 다시 더 힘쓰지 못한 것도 실상은 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왜적들이 또 다시 쳐들어옴에 있어 모가 미처 손쓰지 못한 것도 무슨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 장수들이 한 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는 제 마음대로 못하는 바,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그때 곧 전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며, 또 바다의 풍세가 좋았는지 아닌지, 뱃길도 편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군들이 각기 담당이라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은 이미 도체찰사의 장계에도 밝혀진 바도 있거니와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정이 또한 그랬던 것인 만큼 모든 책임을 모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난 장계 가운데 쓰인 사실이 허망함에 가까우므로 괴상하기는 하지만, 아마 그것은 아랫사람들의 과장된 말들을 얻어들은 것 같으며, 그 속에 정확하지 못한 것들이 들어 있지나 않은가 여기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신으로서는 자못 풀어 볼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난리가 일어났던 첫 무렵에 공로를 적어 올린 장계가 낱낱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남의 공로를 탐내어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그로써 죄를 다스린다 하면 모인들 또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을 빼고는 저와 남이 상대할 적에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자가 적고,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잘못되는 일이 많으므로, 윗사람이 그 저지른 일의 크고 작음을 자세히 살펴서 경중을 따져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장수된 자는 군사와 백성들의 운명을 맡은 이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사람이라, 그들의 소중함이 이와 같으므로 예로부터 제왕들이 국방 책임을 맡기고 은전과 신의를 특별히 보여 큰 무엇이 있지 않으면 간곡히 보호하고 안전케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니, 큰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이나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막아내는 것과 가장 관계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 못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게다가 사리를 살펴 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저 감정을 품은 원균 같은 사람까지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며, 안팎의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해이해질까봐 그게 실상 걱정스럽고 위태한 일이며, 부질없이 적들만 다행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일개 모의 죽음은 실로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계되는 것은 가볍지 않은 만큼 어찌 걱정할 만한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날에도 장수는 갈지 않고 마침내 큰 공을 세우게 했던 바, 진나라 목공이 맹명 장군에게 한 일과 같은 것이 실로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신은 구태여 먼데 사실을 따오고자 아니하고 다만 성상께서 하신 가까운 사실로써 말할지라도, 박명실이 한 때의 명장인데 일찍 국법에 위촉되었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었더니, 얼마 안되어 충청도에 사변이 일어나 기축년(1589년) 때보다 더한 바 있었는데, 명실이 나가 큰 변을 평정시켜 나라에 공로를 세운 것이야말로 허물을 용서하고 일을 할 수 있게 한 보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모는 사형을 받을 만한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모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 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상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려 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면, 성상의 난리를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 됨이 어찌 옅다고만 하겠습니까?
  • 담당부서 : 제승당관리사무소   
  • 연락처 : 055-254-4481

최종수정일 : 201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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