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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가 겨레의 꽃으로 된 유래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배달겨레", "백의민족"이라 일컬어져 왔다.

배달(倍達)은 단군의 박달에서 나온 것으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백의 민족은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고 순결을 중시하여 불려진 것이다.

이러한 배달겨레의 민족성을 닮은 꽃이 무궁화이며 끝없이 피고 또 피어 영원무궁토록 빛나라는 겨레의 염원이 서려 있는 꽃으로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5천여 년을 배달겨레와 함께 자연스레 겨레의 꽃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배달겨레와 무궁화 - 고조선부터 조선사대까지의 역사적 배경

무궁화에 대한 기록은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반만년 동안 우리민족과 함께 했음을 알수있다. 상고시대 [단기고사] 에는 무궁화를 "근수(槿樹)", [환단고기] 에서는 환화(桓花),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는 등 단군시대에 무궁화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고대 중국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과 고금주(古今住)에도 무궁화가 많은 나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효공왕은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우리나라를 스스로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장원급제한 선비의 어사관에 무궁화를 달아주는 등 영광스러운 꽃으로 사용되었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한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부른 애국가 후렴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 산"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렇듯 무궁화는 우리 국민과 애환을 같이 하였고 정부수립과 더불어 나라문장과 기, 훈장, 휘장, 각종 국가상징물 등 각 분야에 널리 활용되면서 자연스레 우리겨례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무궁화 - 무궁화의 역사적 고증

무궁화가 배달 겨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단군조선의 건국 이전인 선사시대에 환나라 꽃인 '환화(桓花)"로 배달 겨례와 인연을 맺었고, 단군조선사대에는 "훈화(薰花)", "천지화(天指花)" 를 머리에 꽂고 다녔다는 사실이 4천3백여 년 전에 쓰여진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 에 "훈화초(薰花草)" 로 기록되어 있으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우리 문헌에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당.송시대나 고려때에는 시인.묵객들이 무궁화를 예찬한 시가 많이 보인다.

규원사화(왼쪽)/단군세기(오른쪽)

산혜경(왼쪽)/단기고사(오른쪽)

  • 담당부서 : 산림환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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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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