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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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통치

무궁화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겨레의 맥박 속에 숨쉬어 온 꽃이기에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독립지사들이 광복 구국정신의 표상(表象)으로 내세우자 일본은 당황하여 무궁화를 보이는 대로 뽑아 없애는 등 민족의 수난과 함께 참혹한 시련을 겪어 왔다.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일제의 무궁화 말살에 관한 무언의 항변들

선조들의 무궁화 수호정신

우리나라 말과 글이 일제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암울한 암흑기에

- 우호익은<무궁화고>에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고 체계적인 연구로 무궁화의 사적 가치를 고찰하였고, 조선의 국화(國花)로 숭배하게 된 유래를 증명하여 나라꽃 무궁화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한서 남궁 억은 무궁화 말살을 위해 광분하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나눠 주고 무궁화가 자라는것을 지켜보면서 꺼저가는 구국혼을 불러 일으키는데 선봉적 역활을 하였으며,

- 1931년에는 "무궁화 동산" 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무궁화를 보급하여 오던 중 1933년 11월 2일 시조사원(時兆社員)을 사칭한 경찰에게 사쿠라(벗나무)는 활짝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의 역사도 영원할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70,000본에 이르는 무궁화가 불에 태워졌고 선생은 붙잡혀가 옥고를 치루게 된 무궁화 동산 사건 (십자가당 사건)이 있었다.

남궁 덕에 의해 창간된 교육잡지/동광에 실린 '무궁화 고'/남궁억의 초상화

생육특성 조선소년군 항건. 중앙학교 무궁화 도안 탄압사건
조선소년군(조선보이스카우트)항건

무궁화는 민족정신의 표상(表象)으로 당시 학교나 단체에서는 무궁화 그림을 삽입한 상징물을 만들어 섰다. 론 이 상징물은 일제의 단손에 걸렸고 압수되었다. 1922년 조철호(趙喆鎬)는 민족의 독립을 성취해 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뜻을 갖고,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큰 생사가 있을 때에 장내 정리를 위하여 파견하였다.

1937년 7월 31일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시국강연회가 열렸을 때에도 조선소년군의 항건(스카프)에 새겨진 위장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태극, 한글표어, 무구오하가 모두 민족정신의 표시이며 일본에 항거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그날부터 조선소년군의 항건압수, 간부구금, 집회감시 등 수난을 당하였다.

1930년대의 중앙학교 휘장

무궁화는 민족정신의 표상(表象)으로 당시 학교나 단체에서는 무궁화 그림을 삽입한 상징물을 만들어 섰다. 론 이 상징물은 일제의 단손에 걸렸고 압수되었다. 1922년 조철호(趙喆鎬)는 민족의 독립을 성취해 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뜻을 갖고,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큰 생사가 있을 때에 장내 정리를 위하여 파견하였다.

1937년 7월 31일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시국강연회가 열렸을 때에도 조선소년군의 항건(스카프)에 새겨진 위장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태극, 한글표어, 무구오하가 모두 민족정신의 표시이며 일본에 항거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그날부터 조선소년군의 항건압수, 간부구금, 집회감시 등 수난을 당하였다.

고려대학교 본관 정문에 새겨진 무궁화조각

1934년에 준공된 고려대학 본관 정문에 두개의 돌기둥이 서있다. 이것이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普成專門)의 정문이었는데, 전면에는 호랑이가, 후면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무궁화조각이 돌기둥 후면에 조각되어 있어서 일본 경찰의 눈에 띄지 않고 수난을 면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무궁화 조각
  • 무궁화 조각
  • 무궁화 조각
일제의 무궁화 말살사건

3.1운동후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창간호에 조선은 곧 무궁화 동산이라 표현하였고 제호 도안도 무궁화로 둘렀으며 매년 무궁화 사진도 게재하였는데 이는 무궁화를 통해 민족정신을 더욱 고취하려는 무언의 저항 정신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8년에 이르러 제호의 무궁화 도안이 검열에 걸려 그해 2월9일자 신문부터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이 삭제되고 그자리를 가로줄 메운 제호가 실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외 근화여학교의 교복사건, 오산학교의 무궁화 동산. 대구사범의 무궁화 동산사건 등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1934년 당시의 오산 고등보통학교가 일제의 강제 철거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낸 무공화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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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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