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Gyeongnam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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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들

무용수들

 

전시기간 : 2017. 9. 7 ~ 12. 6

전시장소 : 1,21,2,3 전시실, 특별 전시실

참여작가

   할릴 알틴데레 (Halil Altindere)

   이고르 그루비치 (Igor Grubic)

   요아킴 코에스터 (Joachim Koester)

   줄리안 뢰더 (Julian Röder)

   서평주 (Seo Pyeung-Joo)

   안정주 (An Jung-Ju)

   옥인 콜렉티브 (Okin Collective)


   기획자 : 조선령 



몸짓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우리는 몸짓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제도화된 예술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무용이나 운동경기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몸짓은 보통 우리의 시야를 비껴나 있다. 그러나 몸짓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우리는 몸짓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를 표현한다. 요컨대 우리는 몸짓을 통해서 살아간다. 우리는 타인의 몸짓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들이 수행하고자 하는 목표를 납득한다. 요컨대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인 한, 몸짓은 삶의 바탕이자 토대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몸짓들 중 상당수는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며 때로는 정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체조를 하고 시위를 하고 병에 걸려 몸을 떨며 재난을 피해 도망치며 선거유세를 하며 때로는 폭력을 행사한다. <무용수들>은 몸짓이 갖는 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영상 작가들이 전시장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를 탐구하는 전시이다. 이 몸짓은 시위(줄리안 뢰더), 폭동과 진압(이고르 그루비치), 난민들의 탈출(할릴 알틴데레) 등 정치적인 것이거나, 군대의 체조나 기 수련 혹은 선거유세 같은 매뉴얼화된 동작(서평주, 옥인 콜렉티브, 안정주), 히스테리적 경련과 같은 병리적 제스처(요아킴 코에스터)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보통 이러한 상황이 갖는 내용에만 주목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참여 작가들은 이 사건 속의 동작들이 가진 형식적차원에 주목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형식적 차원에 주목한다는 것은 내용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가 갖는 숨겨진 의미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작가들은 몸짓이 가진 원래의 목적을 괄호침으로써오히려 몸짓의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가능성이란 사회적 몸짓들을 단지 반복하거나 비판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이 영상과 사진 매체를 통해 포착한 이 몸짓들은 매우 복합적인 층위를 가진다. 그것은 관성적인 동시에 우연적이다. 그것은 상투적 움직임기도 한 동시에 돌발적인 동작이다. <무용수들>의 참여 작가들은 사회적, 정치적 장의 몸짓들을 예술적으로 변용한다. 그러나 이 변용은 원래의 몸짓이 가진 의미를 모두 삭제하는 작업이 아니다. 목적을 잃고 형식만 남은 몸짓들은 오히려 몸짓이 목적에 종속되었을 때 발휘되지 못한 잠재력을 드러낸다. 이 잠재력은 명료하게 이름붙이기 어려운 모호하고 유동적인 영역이다. <무용수들>은 이 모호한 영역을 탐구하는 전시이다.

 

사회적, 정치적 영역의 몸짓을 예술적으로 변용한다는 주제 이외에, 이 전시는 두 가지 암묵적인 참조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 이론가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몸짓 개념이다. 아감벤은 몸짓이 제작’(목적이 있는) 행위’(목적이 없는)와 구별되는 제3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제작의 경우 수단은 목적에 지배된다. ‘행위의 경우 수단은 목적과 무관하다. 그러나 몸짓의 경우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단은 목적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관하지 않다. 몸짓은 목적을 일시정지시킴으로써 혹은 괄호침으로써오히려 수단의 순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원래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의미의 지평을 형성한다. 수단의 순수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그 공허한 형식만이 남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은 그 자체로 사회 속에서 명확한 역할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반대로, 아감벤에 따르면, 수단의 순수화는 그 수단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구속이나 정치적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는 이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무용수들>은 몸짓의 해방이라는 이 주제를 영상매체의 차원에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이 이 전시의 두 번째 참조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전시에는 영상매체가 인간의 몸짓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사가 깔려 있다. 19세기에 머이브릿지와 마레이가 크로노토그래피(연속사진)을 발명하고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이래, 영상매체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움직임을 가시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인간 신체의 움직임은 그 중요한 목표였다. 사실상, 영상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 몸짓은 단지 은유적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영상매체는 인간의 몸짓을 예술적으로 포착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매체의 역사 속에 등장했다. 혹은 영상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운동이나 몸짓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한다는 것은 재인(再認)한다는 것이며, 재인한다는 것은 움직임이 기록되고 저장되어 원할 경우 다시 볼 수 있다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영상 이외에 사진을 포함시킨 것은 영상이 사진의 논리적 후예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 속에 기록된 인간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그 목적을 상실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이미 원래의 행위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이기 때문이며, 원래의 행위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충만한 순간을 희석시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움직임의 환영(幻影)이 연속적 현실의 분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언급해야 할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움직이는 이미지로 구성된 영상은 19세기는 물론이지만 오늘날까지도 그 기술적 한계로 인해 현실에서 발생하는 운동을 정보의 손실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작가들이 사진과 영상을 매체로 선택한 그 순간 이미 목적이 괄호쳐졌다고 혹은 몸짓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체의 역사나 형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무용수들>은 단순히 순수 몸짓의 가시화를 탐구하는 전시가 아니라 영상매체가 순수 몸짓의 가시화를 위해 하는 일을 탐구하는 전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하 작가 소개글)

 

할릴 알틴데레 (터키, 1971년생)

 

작가, 큐레이터, 출판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온 할릴 알틴데레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터키의 주요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이다. 작가는 젠트리피케이션(도시 고급화에 의해 원래 주민들이 외곽으로 쫓겨가는 현상)에서 중동/북아프리카 난민 문제까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쟁점들을 소재로 삼되, 랩 뮤직 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풍자적이고 경쾌한 형식의 작품을 만든다. 작품에 출연한 래퍼들은 실제 사건을 겪은 당사자이면서 작품의 협력자이기도 하다. <원더랜드>는 이스탄불 외곽의 도시 재개발로 피해를 입은 그 지역의 래퍼들과, <홈랜드>는 시리아에서 독일로 탈출한 난민출신 래퍼 아부 하자르와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이고르 그루비치 (크로아티아, 1969년생)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크로아티아 작가 이고르 그루비치는 퍼포먼스, 영상, 사진 등의 매체로 작업한다.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개인의 감각과 만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는 종종 공공장소에서의 정치적 행위를 소재로 삼는다. 그의 작업은 구 유고연방의 붕괴 이후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정치적 혼돈의 경험과 196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결합하여 동시대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혹은 작품을 구성하는 모호한 몸짓들은 폭력의 기억과 자유의 리듬을 동시에 표현한다. <366 Liberation Rituals>는 작가가 자그레브의 여러 장소에서 수행했던 366일의 퍼포먼스에 대한 기록이다.

 

요아킴 코에스터 (덴마크, 1962년생)

 

요아킴 코에스터는 영상, 사진, 텍스트, 개념적 작업 등의 매체로 작업해온 덴마크의 대표적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종종 공식적인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방치되고 망각된 기억을 재조명하는데, 서구 모더니즘 예술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몸짓을 비롯한 감각적 행위는 이 재해석의 주요 수단이 된다. 작가는 미신과 주술이 지배했던 공간들이나 특정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 기억을 재구성한다. 영상 작품을 만들 때 코에스터가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16mm 필름과 아날로그 영사기는 이 기억이 의식 너머의 물질적 토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줄리안 뢰더 (독일, 1981년생)

베를린을 주요 근거지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줄리안 뢰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화(글로벌리제이션)라는 개념 혹은 현상을 둘러싼 변화와 충돌의 현장을 추적하여 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해왔다. 예를 들어 2003년부터 작업해온 시리즈는 EU 정상회담, G8 정상회담 등 세계화 관련 주요 정상회담 주변에서 벌어진 시위대들을 포착한다. 이 때 뢰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참여자들이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 즉 몸짓, 의상, 마스크 등이다. 보도사진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사진들을 그렇게 규정짓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평주 (한국, 1985년생)

역사적 기억, 정치적 쟁점, 재난 등의 소재를 다루는 부산 출신의 서평주의 주요 관심사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이다. 그는 개인의 감각과 무의식 속에 각인된 전체주의적 제스처,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과 사회 구조 사이의 관계를 등을 몸짓, 기호, 사물 등을 통해 표현한다. 신문의 특정 글자와 사진을 지우고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맥락으로 읽게 만든 <황색신문> 시리즈를 비롯, 작가는 원전재난, 보도연맹 사건, 80년대 운동권 문화 등의 문제를 회화, 사진, 영상, 설치 등의 매체를 통해 다루어왔다. <새천년 생명 체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그 중에서도 몸짓 혹은 감각에 각인된 집단적 규율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작업들이다.

 

안정주 (한국, 1979년생)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안정주는 사운드를 중심부에 놓은 영상 작업을 주로 해왔다. 안정주는 주어진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음향과 이미지라는 감각의 단위들을 소재이자 주제로 삼는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종합적 현실에서 감각의 무의식적 단위라고 할 만한 것들을 추출하는 분석적 작업이다. 이러한 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은 현실의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보이는(들리는) 것과 보이지 않는(들리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선을 재구성함으로써 경험을 구성하는 토대를 드러내는 것이다. 몸짓 혹은 신체 동작의 차원은 <열 발의 총성> 이후 작가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신작 <사이렌>은 고속도로변에서 발견되는 교통통제 인형들의 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옥인 콜렉티브 (한국, 이정민, 진시우, 김화용)

서울을 중심으로 작업해온 옥인 콜렉티브는 이정민진시우김화용 세 명의 작가로 구성된 그룹이다(2017년에는 강신대 작가가 객원멤버로 참여).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의 매체로 작업하는 옥인 콜렉티브는 무엇보다 공간, 신체, 사물들을 이용한 일시적 퍼포먼스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계획되지 않은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오브제나 공간의 특수한 성격을 이용하여 고의적으로 부조리한 행위를 함으로써 신체, 사물, 행위의 틈을 탐구하고 견고한 관념들을 해체한다. <작전명> 시리즈는 재난이나 혁명과 같은 거시적 사건을 목적없이 공회전하는 미시적 행위들로 표현함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허약함을 풍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