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의 정비와 반격

명군의 참전

일본군이 침략을 개시한 지 한 달여 만에 호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의주로 피난한 선조도 큰 위협을 받게 되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파병 여부를 놓고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을 친다(가도입명,假道入明)’를 의식하면서 평양 함락으로 인해 더욱 자국이 위급하게 되자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요양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5천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들 원병은 국경수비병이었다.

명나라 군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이르러 풍우가 몰아치는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이 공격에서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의 장수가 전사하였고, 조승훈은 잔여군사를 거두어 퇴각함으로써 1차 구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강화교섭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對陣)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에 걸쳐서 강화를 청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하다가 1차 명나라 군의 참전을 계기로 명과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차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쌍방간의 화의조건을 논의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50일 이내로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심유경과 고시니는 왜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않을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한편 1차 구원군이 실패함에 따라 명나라는 강화하자는 의견과 파병하자는 의견이 나뉘어 논란이 되었으나 결국 파병으로 기울어져 감숙성(甘肅省) 영하(寧夏)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1592년 12월, 이여송은 4만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평양성탈환전투와 행주대첩

이여송의 명나라 구원군은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부근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에서도 순변사 이일(李鎰)과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하였고 의승군도 가담하여 1월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ㆍ명연합군이 칠성ㆍ보통ㆍ함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고니시 등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성(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건너 남으로 패주하였다. 고니시는 주야로 계속 이동하여 2월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는데 해주를 근거로 삼았던 구로다가 출영하여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은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의 퇴로를 끊게 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이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하자 이곳을 지키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물고 있던 구로다와 함께 한양로 퇴각하였다. 왜군이 대결하지 않고 계속 후퇴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그뒤를 바짝 따라 한양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왜군 진영에서는 한양 북쪽 10킬로미터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숫돌고개)에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매복시키게 하고 명나라 군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하였다.
대패하여 기세가 꺾인 이여송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개성으로 퇴각했다.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요청했으나 이를 듣지 않고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의 군이 양덕ㆍ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하리라는 유언을 듣고 부총명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물게 하고 평양으로 퇴진했다.

함경도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모두 한양로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한양로 퇴진했다.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싸움(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년 이치싸움에서 대승하여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 권율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받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물고 있던 대병력을 이끌고 일시에 공격을 가해왔다. 권율이 이끈 관군은 의승장 처영과 함께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