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해역 선정 경위

칠천량해전의 규모 및 결과

칠천량해전의 규모 및 결과
구분 해전명 교전날짜 참전세력 일본장수 전과 비고
조선 일본 군선 전사/부상
정유재란 칠천량 1597년
7월7일

7월16일
전함
180척
전함
600여척
가토
고니시
- 거북선,판옥선
140~160여척 파손
수군 10,000여명 전사
원균지휘

※ 자료 : 해군충무공리더십센터, 충무공이순신, 해군교육사령부, 2004.

  • 조선수군의 전력 손실이 가장 많은 해전으로 거북선, 판옥선 등 140~160여척 파손, 10,000명의 수군 전사
  • 거북선·판옥선 등의 전선 및 관련 유물의 해저 매몰 가능성이 가장 높음

칠천량 해전 군선 배치 상황

어온리 포구
  • 현지 조사를 통해 추정한 위치(김일용)
  • 장목포와 송진포 왜성을 쌓고 일본군 주둔으로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한 물안리 포구 쪽은 조선 수군이 정박했을 가능성이 낮고, 유사시 도주를 위해서도 어온리 포구가 유리하다고 판단됨
  • 어온리 포구 일대는 수심이 5m 이하로 매우 얕은 상황인데, 현재의 해안선은 칠천량해전 당시보다 바닷쪽으로 더 내려온 것으로 판단됨
옥계 마을 앞 해안 포구
  • 오른쪽 돌출부 지형으로 만곡을 이루고, 왼쪽은 씨릉도로 둘러싸여 자연스런 포구 형성함. 해전이 펼쳐졌을 경우 퇴로를 열기에도 유리함
  • 일본의 『협판가전기(脇坂家戰記)』에 조선 수군이 주둔한 곳을 ‘해협 내의 산록에서 앞 바다 섬에 쭉 이어져 보인다.’ 라고 운운한 것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추정됨
  • 현재의 포구는 이전 시기 조선소 활용을 위해 상당 부분 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주요 격전 지역
  • 견내량 쪽 입구에서 가까운 포구로 세 곳 중에서 가장 넓어 많은 척수가 정박할 수 있으며 칠천량 해협 입구에서 가까워서 퇴로를 통해 함대를 이동하기에 적절함
  • 김완의 해소실기에 해전이 펼쳐진 직후 탈출했던 일부 군선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곳처럼 입구에서 가까운 쪽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주요 격전 지역

정박 포구
  • 기습을 받았으므로 당시 정박한 포구 주변의 해안가에서 전투가 벌어져 분멸되었을 가능성이 큼
칠천량 해로
  • 칠천량 해협을 빠져 나가려는 조선 수군과 이를 저지하고 공격한 일본 수군과의 접전이 펼쳐짐
가조도와 거제도 사이의 바다와 견내량 입구 이전의 해역 주변
  • 후퇴를 위해 조선 함대가 진행했던 곳으로 조선 수군이 퇴로를 열고 후퇴할 경우 가장 안전하고 다음 기회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 쪽이 한산도 본영으로 통하는 이 곳 해역임
현재의 진동만 앞바다인 진해만 일대
안정만 가스 산업단지 일대
  • 원균이 전투를 지속하다 마지막으로 상륙했다가 전사한 곳으로 알려짐

거북선 탐사대상지 선정의 사료적 근거에 대하여

경상남도이순신프로젝트역사고증위원회(위원장 나종우)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주력함선은 판옥선이며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활약하였다. 거북선은 1592년 사천해전에 최초로 출전하여 용구에서 천자총통 등 대형화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키는 활약을 시작으로 이순신장군의 연전연승의 요체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칠천량 해전 발발 이전은 이순신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수군의 함선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