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의 길

노량해전 이전의 상황
  • 연전연승을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하기까지의 과정과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괴멸될 위기에 처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깊이 되새겨 보자.

백의종군의 길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과정을 알아보자.

1597년(선조 30년) 1월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평화 교섭이 깨어지자 2차 침입 명령을 내렸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선봉으로 하여 1월 15일 1만 4,500명의 군사로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막지 않았고, 부산진 방화사건을 허위로 보고했다는 죄목으로 1597년 2월 26일 전라좌수영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새 통제사 원균에게 모든 업무를 넘겨주고 3월 4일 투옥되었다.
온갖 고문을 받고 죽을 고비에서 정탁의 진정서로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와 백의종군[白衣從軍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 터로 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가 옥에 갇힌 지 28일 만이었다.

4월 3일 이순신 장군은 도원수 [都元帥고려, 조선 시대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통괄하던 임시 무관 벼슬] 권율의 지휘 아래로 들어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 전라좌수영에 머물던 어머니께서 이순신 장군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아산으로 돌아가던 중 82세로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悲報슬픈 소식]를 접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는 몸이라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4월 19일 어머니의 영전에 울며 하직을 했다.
그 날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의 몸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의 몸

라고 심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공주를 거쳐 익산, 남원, 구례를 통과하여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있는 순천고을에 도착하여 합천 초계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