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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의 중심, 백산 안희제 생가와 상로재

온라인 명예기자단 박치곤

박치곤





산은 푸르고 들녘에는 요즘 금계국 물결로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시기 입니다. 한 낮의 온도가 제법 정수리를 간지럽히고 시원한 물을 찾게 합니다. 5월의 신록을 감상하며 길을 떠난 곳은 의령군 부림면에 위치한 입산마을의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와 상로재입니다.
의령군 부리면의 입산마을은 탐진안씨들의 집성촌 입니다. 입산마을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원스럽게 조성되어 있는 입산마을의 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터 주차장 입니다. 마을 공용 주차장으로도 활용 될 수 있고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도 주차 걱정 없는 탐방이 가능 합니다.

 

 


입산마을은 호국 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농촌다운 풍경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인데, 탐진 안씨가 1,600년 초에 한 고승의 예언을 쫒아 길지로 알려진 입산으로 이주하여 10 종가 천석지기 부자 이름으로 대를 이어온 탐진 안씨의 집성촌 입니다.
항일 애국지사였던 백산 안희제 생가와 항일 독립정신의 배양 소였던 사립 창남학교, 지역의 인재를 배출한 고산재가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가 5곳이나 모여 있을 정도로 역사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 입니다.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초가집 한 채와 고택 한 채가 전부 입니다. 소박한 생가와는 달리 실제로는 부자였는데요. 실제 경제력과는 달리 이렇게 소박한 모습의 생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독입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했기 때문이랍니다.

 


목마름을 달래주는 우물이 생가 한쪽에 있는데,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도움이야말로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한 모금의 생명수와 같았던 독립운동자금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재조명하며 1982년 6월 21일 부터 1982년 9월 14일까지 MBC에서 월화드라마로 방영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민족말살 정책에 분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던 안희제 선생의 업적으로 지금의 우리는 편안하고 넉넉한 삶을 조국이라는 터 안에서 영위하며 살아 갈 수 있을게 아닐까 합니다.

 

 


백산 안희제 생가는 안채, 사랑채 2동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 건물로 안채의 취편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7살 때부터 집안의 형인 안 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매우 총명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19세이던 1903년 7월, 선생은 의령. 합천. 삼가. 진주. 하동 등지의 선비들과 지리산 그리고 섬진강 일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남유일록'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외롭게 서있는 백산고택이라는 현판만이 백산 안희제 생가 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 살아가던 시기는 조국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때 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사이에 일본은 청일전쟁 후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게 되고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 시키려는 야욕을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조국이 일본의 야욕으로 신음하게 되자 안희제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우선임을 깨닫고 고향인 의령에 의산학교,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처분하여 백산성회를 설립하게 되고 1917년 윤현태와 함께 백산합자회사로 규모를 확장했습니다. 이후 1919년 5월에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칭하였는데, 그 당시의 수익은 모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할 정도의 재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독립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거나 주택건설과 함께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발해학교를 설립하던 중 1942년 10월 대종교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고 8월 3일 5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를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만나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고택, 바로 상로재입니다.

 

 


상로재의 소박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외삼눈인 이필문에 들어섭니다. 넓은 마당이 시야에 들어오고 상로재 건물로 들어가는 문을 또 한 번 만나게 됩니다.

 

 


1722년 초창 이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1922년 중창 되었으며 지금의 외삼문인 이필문의 기와의 일부분도 몇 해 전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상로재는 1722년 설 산재 안 여석이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건립했다고 합니다. 설 산재 안 여석은 영남의 구학본산으로 접장 유치명, 이진상 공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였던 상로재 인근에 있는 고산 제를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상로재는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실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지만 앞서 백산 안희제 생가를 설명하며 언급했던 창남학교의 임시건물로 이곳 상로재를 이용했습니다. 항일독립운동 정신의 배양소 역할들 톡톡히 했던 상로재,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와 함께 둘러보면 좋은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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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곤


 

 

 

항일독립운동의 중심, 백산 안희제 생가와 상로재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의 중심, 백산 안희제 생가와 상로재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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