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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독립운동가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후손들은 늘 빚진 마음입니다

온라인홍보 명예기자단 김대중

김대중

 

평소 출퇴근하는 경로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운전 중에 얼핏 본거라 정확히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는데 퇴근할 때 신호등에 노란 불이 들어와 서행하면서 신호대기를 한 다음 자세히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그림 1_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현수막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현수막

 

“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최수봉 의사? 순국 99주기를 계산해보니 1921년인 것으로 보아 독립투사신 것 같은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분이셔서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2016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하여 설명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림 2_국가보혼처의 최수봉 의사 설명 포스터국가보훈처의 최수봉 의사 설명 포스터

 

최수봉 의사를 설명한 내용은 “의열단 출신으로 식민통치 폭압기관이었던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이었습니다. 밀양경찰서에도 폭탄이 투척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바로 최수봉 의사의 거사인 줄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죄책감을 느끼며 최수봉 의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국가보훈처의 설명을 읽어 보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독립투사의 기질을 보이셨던 일화가 있는데요.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현재의 밀양초등학교 전신)에 재학 중 일본인교사가 단군이 일본 대화족 시조의 아우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했는데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선생님 이야기가 틀렸다고 답을 했더니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10년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학교에 편입하여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웠고, 1912년 범어사에서 운영하던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1916년에 들어서는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사금광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했고, 1919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윤세주, 윤치형과 함께 3월 13일 밀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제에게 수배를 받게 되고,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습니다. 이때 최수봉 의사는 길림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동료들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운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습니다. 1920년, 의열단이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수봉 선생은 이종암 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밀양의 의열기념관에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에 대한 웹툰영상이 방문한 시민들에게 제공되어 있어 여기에도 공유해 봅니다.

 

영상에 이어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의 일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 놓고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첫 번째 폭탄을 던졌으나 하필 순사부장의 몸에 맞아 충격이 약해진 때문인지 불발탄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던진 폭탄은 큰 폭음을 내며 터졌으나 위력이 약하여 타박상 수준의 피해를 입혔을 뿐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제 경찰의 추격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피체 당하고 말았는데 이 때 최수봉 의사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최수봉 의사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속행되었는데, 1·2·3심 모두 단시일 내에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종결되었습니다. 최수봉 의사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해보려는 총독부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상고에서 최수봉 의사는 “우리 3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나는 투탄한 것이다.”라며 의지를 밝히기도 하셨습니다. 확정 판결 이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대구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받아 젊은 나이에 순국하셨습니다. 식민통치의 대표적 폭압기구인 경찰서를 타격한 최수봉 의사의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키면서 각오를 새로이 다지게끔 하였습니다. 경찰은 경찰대로 언제 또 그런 양상의 폭탄거사가 터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며 노상 전전긍긍하였고, 이후 의열단 및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켜 추가 의거계획을 세워 최수봉 의사 순국 두 달 후에 단신으로 총독부 타격에 나서서 통쾌한 성공을 거둔 김익상 의사의 의거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최수봉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림 3_최수봉 의사 재판 당시 사진최수봉 의사 재판 당시 사진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공한 이야기만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과 같은 장기전에서 성공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도전이 뒤를 받쳤는지까지는 관심이 도달하지 못합니다. 저는 최수봉 의사의 내용을 접하고 이런 분을 밀양에서 배출해서 활동까지 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에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최수봉 의사의 추모제를 취재하려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장소로 공지된 밀양시 상남면에 있다는 ‘최수봉 의사 추모기적비’가 어디있는지 몰랐습니다. 자주 방문하는 지역이었던터라 어디에 있을지 검색했더니 한 때 다니던 교회 바로 옆이라 놀랐습니다. 사실 그동안 지나가면서 누가 이렇게 길가에 묘비를 세웠을까 생각하며 흉보며 지나갔었는데 바로 그것이 “최수봉 의사의 추모 기적비”였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최수봉 이사 추모 기적비

 

이 날은 날씨가 아침부터 매우 더웠습니다. 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는 성균관유도회 밀양시지부 상남면지회와 밀양향토청년회ㆍ지도회가 주관하여 더운 날 고생이 많았습니다. 행사장 입구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체온 측정과 손소독, 그리고 발열자를 위한 별도 격리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앞 쪽에는 추모제를 위한 헌화단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헌화단

 

최수봉 의사 유족을 비롯해, 특히 지난 주 지자체 및 경남도ㆍ밀양시의회 등이 후반기를 새롭게 출발한 시점이어서 박일호 밀양시장, 황걸연 밀양시의장, 예상원 도의원 등이 참석하여 추모를 함께 했습니다. 행사는 생활 속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추모시 낭송, 최수봉 의사 약력 소개, 기념사/추모사/추념사, 헌화 및 분향, 추모제의 마지막은 참석자 전원이 최수봉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입구에서 나눠준 태극기를 들고 밀양향토청년회 이재식 회장의 선창에 맞춰 만세삼창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림 6-1_헌화하는 박일호 밀양시장헌화하는 박일호 밀양시장


그림 6-2_헌화하는 밀양향토청년회 회원들헌화하는 밀양향토청년회 회원들

 

지금으로부터 99년 전 7월 8일 최수봉 의사께서 순국하셨던 날도 매우 더웠을 것 같지만 그 분의 애국심보다 더 뜨겁지는 못했을 겁니다. 나라를 위해,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최수봉 의사의 뜻을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대중 

 

최수봉 독립운동가 순국 제99주기 추모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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