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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찬란한 역사》홍재희
2023-10-18
《보통 사람들의 찬란한 역사》홍재희

홍재희, 아버지의 이메일, 201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89, 인디스토리 배급

 

 

홍재희(서울, 1971-)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였습니다. 단편 영화 <먼지>(2003)로 제6회 벨로호리존테국제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암사자들>(2008)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1회 토리노국제여성영화제 등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홍재희는 스스로를 비정규 노동자이자 비혼여성, 주변인으로 정의하며,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영화와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주로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감춰진 삶, 말해지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며,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민주화를 꿈꿉니다. 대표작으로는 <먼지>(2003), <서울, 천사의 시>(2005), <암사자들>(2008) 등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메일>(2012)은 홍재희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소위 컴맹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1년간 딸에게 보낸 43통의 이메일과 가족들의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영화입니다. 지극히 개인사라 여겼던 아버지의 삶 속에는 분단, 6.25전쟁, 월남전, 중동 건설 붐, 88올림픽과 아파트 재개발 광풍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의 비극과 우여곡절을 견뎌온 아버지의 삶, 그로 인해 고통 받았던 가족의 삶은 그 시대를 지나온 보통의 사람들의 초상입니다. 작품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저마다의 삶을 위로하고 세대 간의 소통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 학벌도 지연도 연줄도 없이 투지와 오기 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평범한 한 사내가 있다.

황해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열다섯의 나이에 남조선이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맨주먹으로 반드시 성공하겠노라고 살아남겠노라고 결심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에게는 여기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세상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는 제 용기와 머리 하나만을 믿고 독일, 미국, 브라질, 호주 등 어디든 외국으로 이민을 간절히 꿈꾼다. 그러나 그의 아메리칸 드림은 연좌제라는 복병을 만나 끝내 영원히 좌초된다. 그는 제 운명에 대한 분노와 자책 그리고 절망감 속에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내다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능력한 실업자 아버지로,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좌절한 마초로, 레드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반공주의자로,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학대하며 가정의 폭군으로 가족 모두를 기나긴 고통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과거사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몸부림쳤지만 그는 결국 이 땅을 떠나지 못했고, 그렇다고 이 사회에 정착하지도 못한 채 이방인처럼 일생을 부유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는 남조선으로 가고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은 탈북자였으며, 돈을 벌려고 이를 악물었던 가난한 고학생이었고, 서독 파견 광부를 자청했던 패기 넘치는 청년이기도 했으며, 미군부대의 기술자로 베트남 전쟁의 복판에 있었고,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1980년대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건설 노동자였으며, KBS 이산가족 찾기 열풍 속에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이들을 찾으려 여의도 광장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닌 실향민이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십여 년을 한 평 방에서 두문불출하다가 한때 88올림픽 자원봉사에 지원하여 외빈 초청 팀에서 활동했고, 공인중개사 1회로 합격한 후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가 사기를 당해 망했으며, 트럭 운전수가 된 후 사고를 내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옥 후에는 비정규 용역 노동자로 빌딩을 청소하며 쓰레기를 줍고 유리창을 닦았다. 그리고 종내 아파트 주민으로 사는 대신 남의 아파트를 지키는 초라하고 늙은 경비원이 되었다. 독서실 청소 노인 봉사로 늘그막을 소일하며 자신의 일생을 책망하던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그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남은 금호동 구옥 집 한 채를 아파트 재개발 광풍에서 지키려다 처절한 회한 속에 결국 술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바로 내 아버지다.

 

감독 홍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