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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7. “나는 여자이고, 여자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대지다.” 이성자
2024-02-13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수장고에는 작품 1300여 점 이상이 보관돼 있다. 전시 작품을 구매하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도내 작가 작품을 사들인 결과다. 하지만, 아쉬운 건 도대체 수장고 안에 어떤 작품이 들었는지, 일반인이 쉽게 알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립미술관 학예사를 통해 수장고 작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로 했다. 글과 사진을 통해서지만, 이렇게라도 하면서 수장고 관리 문제에서부터 도민들과 작품을 공유하는 방법까지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

 

일무(一無) 이성자(1918~2009)는 회화, 판화,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도자,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음과 양, 도시와 자연, 여성과 대지, 우주와 같은 주제를 서정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추상화단의 거장이다. 또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과 함께 여성 특유의 경험과 감수성을 화폭에 담았던 선구적인 여성화가이기도 하다.

 

이성자는 아버지가 경남 지역 군수를 지낸 까닭에 하동, 창녕, 진주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해보통학교를 거쳐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 짓센(実践)여자대학에 진학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곧바로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짓센여자대학은 당시 서구 신학문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진보적인 교육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서 이성자는 가정학을 전공하며 기계, 건축, 요리, 양재, 섬유 등을 공부했다. 당시 여성이 회화를 전공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덕목으로 여기던 가부장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졸업 후 귀국하여 결혼했고, 아들 셋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과 헤어지며 어린 세 아들과도 생이별한 이성자는 1951년 33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유학을 결정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혼을 하거나 가정을 떠난 여성으로서 다시 유학길에 오른 그의 행보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프랑스로 건너간 이성자는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Paris, Academie de la Grande Chaumiere)에서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줄곧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60여 년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성자의 작품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아카데미 시기에는 다소 어두운 색채와 두터운 마티에르의 인물, 풍경, 정물 등의 구상화를 그리다가 점차 자연의 풍경을 추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거친다. 이렇게 추상과 구상을 혼합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모색하던 그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 ‘여성과 대지’를 주제로 추상적 이미지에 아픔이 있었던 개인적 서사를 결합시킨 작품들을 선보인다. 1969년 뉴욕 방문 이후로는 ‘도시’가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점과 선,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자연과 도시 등 대립적 조형들이 조화를 이루는 ‘중복’ 작업이 등장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다시 구상적 자연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주로 하늘을 다루다가 점차 ‘우주’로 옮겨져 말년에는 모든 대립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화해와 상생의 장인 우주를 표현하였다.

 

1962년 제작된 '밭고랑의 메아리'는 ‘여성과 대지’ 시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드넓은 대지를 위에서 내려다 본 듯한 구성에 밭으로 보이는 사각형이 있고 그 내부는 가는 빗금이 쳐져 있어서 밭고랑을 연상시킨다. 주황색, 황토색, 밝은 청색 위주의 부드러운 중간색의 작은 점과 선들을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기하학적 기호로 변모시켜 화면을 밀도 있게 채우고 있다. 마치 과거 여성의 노동이었던 바느질이나 길쌈처럼 짧은 붓질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해 완성한 짜임새 있는 화면은 논과 밭이 있는 모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식을 키워내는 어머니를 상징하기도 한다. 생명의 모태인 땅과 대지를 소재 삼아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타지에 살아가는 이방인으로서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가 특유의 상징적인 추상을 보여준다.

 

/안진화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참고자료

1.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이성자 연보 https://www.jinju.go.kr/rheesjmuseum/c/ARCHIVE/chronology

2. 김이순, <생명의 본질을 기록하다: 이성자의 작품에 나타난 잉태와 근원의 메타포로서의 자연>,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국립현대미술관. 2018.

3. 정연심, <이성자의 초기 작업: 1960년대 '여성-대지', 그리움과 흔적과 그리는 행위>, <이성자의 추상회화 :탄생 100주년 기념전 1977-1968>. 갤러리현대. 2018.

 

 

이 보도 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경남도립미술관 운영과 안진화 학예연구사(055-254-4636)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840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