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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의병 곽재우

조선최고의 의병 곽재우의 파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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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코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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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계절사계절
  • 추천일정1101
  • 여행유형관광
  • 지역의령군
  • 관리기관관광진흥담당
  • 문의전화(055)570-2430
  • 편의시설
    장애인편의시설 놀이시설 수유실 유모차 자전거 와이파이

상세내용

슬기로운 망우당(忘憂堂)의 생애 그의 본관은 현풍으로 성은 곽(郭)씨요, 이름은 재우(再祐)이며, 자(字)는 계수(季綬), 호(號)를 망우당(忘憂堂)이라 하였으니 이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숙종때 나라에서는 충익(忠翼)이란 시호(諡號)를 내리니 여기서 충(忠)은 나라에 충절을 다한다는 뜻이요. 익(翼)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그는 1552년(명종7년) 8월 28일 지금의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전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정암(定庵) 곽월(郭越)이요, 어머니는 진양강씨로 그는 이 두 분 사이의 세번째 아들이 된다. 원래는 선조대대로 경북의 현풍 솔례마을에서 살았으나 이때는 잠시동안 그의 부모들이 외가가 있는 이곳 세간리에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위로 재희, 재록의 두분 형님과 아래로 계모인 김해허씨에게서 난 재지, 재기 두분의 아우가 있었다. 그가 세살때 어머니와 사별하였으니 이어서 맞아들인 계모의 슬하에서 그는 자랐다. 16세 되던 해에 상산김씨와 결혼을 하니 이분은 당대의 거유(巨儒)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외손녀가 되는 분이었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들이 모두 백두서생으로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또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기상이 웅대하며, 이목구비가 준수하여 비범한 용모를 지녔었다. 8세에 한학을 공부하여 10세에 이미 춘추(春秋)를 읽었으며 15세에는 자굴산의 보리사(菩提寺)에 들어가 많은 책을 통독하였다. 뒷날 성부사(成浮寺)가 그의 만장(挽章)에 <보리사낭천권(菩提寺裏千卷)>이라는 귀절을 썼으니 이는 <보리사 속에 쌓인 책이 천권>이라는 뜻이었다. 16세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도학의 심오한 이치를 배웠으며, 글 읽는 여가에 활쏘기와 말달리기 등 무예를 익히는 한편 병서, 천문 등의 학문에도 통달하였다. 이처럼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의 학문이 뒷날의 임진왜란에 크게 공헌하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니 그는 실로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그의 나이 27세때 조정의 사신으로 가는 부친 정암공을 따라 연경에 가서 새로운 문물에 접하고 감동을 받았다. 이때,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포도연(葡萄硯)과 은으로 된 말안장, 붉은 비단은 뒷날의 임진왜란때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의 군장이 되었다. 1586년(선조 18년)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급제, 정시(庭試) 2등이 되었으나, 수일 후에 다시 파방이 되었으니 이는 그때 과거장에서 지은 글이 선조 임금의 뜻에 거슬렸기 때문이며, 이때 그의 나이 34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아니 하였다. 이듬해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3년의 시묘를 마친후 남강변에 정자 하나를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낚시로 세월을 낚으면서 지냈다.

조선최고의 의병 곽재우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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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 문화관광체육국 관광진흥과  
  • 연락처 : 055-211-4611

최종수정일 :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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