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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반하다

[사람에 반하다]광복절 특별인터뷰 혜원 스님

광복절 특별인터뷰 혜원 스님

 

함양 백전면 백운산 자락에 있는 화과원(華果院)은 기미독립선언 33인의 민족대표 중 불교계를 대표한 백용성(白龍城·1864~1940) 선사가 1927년 세운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실천장이자 산사였다. 임야 181만4890㎡, 농지 29만7000㎡에 과수나무 1만여 그루를 심어 가꾸었다. 이름처럼 꽃이 피고 과일이 익는 농원, 화과원은 독립운동을 위한 백 선사의 터전이자, 비밀 독립자금의 텃밭이기도 했다. 6·25 전쟁 여파로 소실된 화과원의 재건을 위해 수십 년 세월을 바친 혜원(慧圓·70) 스님을 만났다.

 

스승 이동헌 큰스님이 주신 숙제

혜원 스님을 ‘문디 스님’이라고 부른다기에 왜 그런가 하고 보니, 왼손가락 4개가 없다. 연지(燃指) 공양으로 태웠다고 한다. “왜 그러셨냐?”고 물으니, “잘 타나 보려고 그랬다”며 웃는 스님 모습이 범상치 않다. 스님은 속가나 개인 신상에 관한 궁금증에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화과원에 대한 질문에는 아낌없이 답변을 쏟아낸다.

혜원 스님은 백용성 선사의 상좌였던 이동헌 스님의 제자이다. 부산 범어사 주지였던 이동헌 스님은 어린 시절 참선에 심취해 있던 혜원 스님을 눈여겨보고, 승려의 길로 이끌어 준 은사스님이다. 머리를 깎고 ‘혜원’이란 법명을 받는 날, 이동헌 스님은 “자네가 화과원을 재건할 것이다”고 말했다.

“고향이 화과원이 있는 함양군 백전면이어서 그랬는지, 이동헌 큰스님께서 예언하시듯 화과원 재건을 숙제로 주셨지.”

 

백용성 선사 행적 좇아 수십년 헤매 다녀

당시에는 그 숙제를 외면했다. 젊은 승려 혜원은 자신의 공부가 먼저였다. 큰 스님들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며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떠돌다보면 늘 함양 언저리에 와 있곤 했다.

1972년 함양군 안의면 법인사와 인연이 돼 함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화과원 유허지를 들락거리게 됐다. 결국 1983년 산청군 생초면에 보현사를 창건하고 주지로 붙박이가 되면서 본격적인 화과원 재건에 나섰다.

한편으론 화과원 재건을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다. 1940년 백용성 선사 입적 후 <용성선사어록>이란 책이 발간됐는데, 운허 스님이 쓴 발문에 ‘용정, 간도에 포교당을 짓고 땅을 매입한 후 중국에서 대각교 포교와 독립운동을 했다’ 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백 선사 개인의 행적은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은 게 없었다. 독립운동 관련은 특히 더했다. 대각교 이름으로 남은 자료들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 1998년 보현사에 찾아온 조선족 신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연길 조선족소년보란 신문사와 장성급 동포들의 도움으로 백 선사의 활동상을 전해들은 노인들과 유물, 길림성 자치주 역사문서국 자료실까지 뒤져 20~30년대 자료를 찾아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백 선사의 국내외 행적을 정리하고 화과원이 독립운동의 장소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현충시설 지정 이어 국가사적지 추진

1991년 터만 남아있던 화과원 초대원장으로 임명된 스님은 그 이듬해부터 백 선사의 거처였던 봉유대 복원작업부터 시작했다. 연면적 132㎡의 건물 한 채 짓는데 20년이 걸렸다. 부족한 자금에, 제대로 길이 없는 해발 1000m 산 중에 건물을 지으려다 보니 자재 나르기를 위해 헬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그 사이 스님의 노력은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과원은 2000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 2017년 11월에는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지난 6월 6일에는 화과원 내 영은사 대웅전 기공식을 열고, 영은사 복원에도 나섰다.
“많은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화과원이 지금은 수풀 우거진 유허지에 불과하지만 후손들이 직접 찾아와 백용성 큰스님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 되기를 바란다.”

혜원 스님의 바람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현재 함양군과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등이 2019년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화과원의 국가사적지 지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황숙경 기자 사진 이윤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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