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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반하다

[사람에 반하다]“어린 시절 친구 떠올리며 구상… 사투리 보전 노력 이어졌으면”

제14회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 대상 수상 박영국 씨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는 2007년부터 열리고 있다. 사라져가는 소중한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애향심과 공동체 정신도 함양한다는 취지다. 경남도가 주최하고 경남문화원연합회가 매년 10월 전후로 열고 있다. 지난해 11월 창녕문화원에서 열린 제14회 대회는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21팀 중 경남도지사상인 대상을 수상한 일반부 박영국(75·창녕군 장마면) 씨를 지난 9월 초 찾았다.

박영국 씨는 사투리를 별로 쓰지 않았다. 대회 당시 그가 제출했던 원고를 보고 평소에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분이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봉화마을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다녔으나, 마산고로 진학하면서 도회지에서 주로 생활했다고 했다. 마산에서 공무원 생활도 오래 했단다. 현재는 창녕문화원 회원이자 봉화마을 이장이다.

“6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자의반타의반 이장을 맡게 됐고 마을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백배 즐겁고 행복합니다. 어려운 이웃도 돕고, 사업비도 따내고, 마을가꾸기사업에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14회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는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별로 영상녹화를 하고, 이를 심사위원들이 심사했다. 이야기의 참신성도 중요했고, 제한시간 5분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박 씨의 발표는 내용도 좋았고, 대회 규정을 잘 지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 내용은 어릴 적 친구들의 생활을 떠올리며 구상했습니다. 고쳐 쓰고 다듬느라 원고 쓰는 데만도 1주일 넘게 걸렸고, 이를 외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이가 있으니 잘 외우기가 힘들더군요.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되뇌기도 하면서 1주일 넘게 외웠답니다. 대상을 받아 참 기뻤고, 사투리를 널리 알리고 보전하는 작업도 지속됐으면 합니다.”

1950~60년대는 전국 어디랄 것 없이 대한민국이 가난한 시절이었다. 박 씨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동네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과거를 돌아보고 또 지역 언어에 관심을 갖게 하자는 취지에서 대회에 임했다고 했다. 다음은 박 씨의 대상 수상 원고와 해설이다. (발음나는 대로 적은 원고여서 사투리 표기와 다를 수 있다)

박정희  사진 김정민

 

 

  원  문  

 

내가 옛날이바구 함 해보까예?” 

 

초근목피 라는 말 한분쭈믄 들어밨지예? 옛날에는 쌀이 업서가 태반은 굴멌다카모 요시 절믄 아-들은 라면 쌀마묵지예 안캅니꺼. 감꽃피모 울 집에 오지마라 카던 시집간 딸래미의 한매친 절규가 이때부터 생긴 말인 강 시픕니더. 봄 대모 양석이 다 떠러지고 안굴믈라꼬 장리쌀을 어더묵던 그 시절에 쌀 한 말 장리로 무그모 가실에는 한말 가오지를 가파야 했던기라에. 엥가이 산다카는집도 지사 때나 설파럴 양밍절 때 아이모 맨자지밥은 깅하기 애러밧서예.

 

피죽도 배불리 못 묵던 그때 쌀이 울매나 기했던지 쌀 한 내끼 더 소출 낼라꼬 태비 만들기에 눈이 뻘개썹니더. 개똥을 마이 주우로 댕기샀다 아임미꺼. 약 할라꼬 개똥을 주우께씀니꺼? 그기 아이고예. 그때는 비료가 비쌌고예 엥가이 기했슴니꺼. 태비거름을 맹글어가 비료대신에 썼다아입니꺼. 태비거름을 맨들라카모 소마구 바닥에 새시랭이로 보리짚이나 나락딩기를 깔아주고 소가 똥이나 오줌을 누게 대모 그걸 사키고 썩게 해가 맹그는기 태비라예. 소똥만 가꼬는 태비재료가 모지랑께 보충을 할라꼬 동네 쭈욱 댕기면서 개똥을 줍는기라예. 개똥도 먼지 본 놈이 임자라꼬 날이 희꿈하모 새벽부터 개가 마이 댕기샀는 저 산먼댕이까지 댕기야 개똥을 마이주웄고 저건니 배껏꿈타 작포때기 양반은 아침아래 벌씨로 개똥을 두소구리나 주웄다카는 이박도 수울케 들어쌌슴미더.

 

소마구바닥에 까는 보리짚도 기해가꼬 산이고 들이고 풀이라카는 풀은 나 비가꼬 거불을 했다 아입니꺼. 요시야 길까고 오데고 온 천지에 거불꺼리지마는 그때는 풀도 와그리 기했등가예. 거불한다꼬 논뚜렁이나 너무밭 깍단에 풀비다가 들키가꼬 도망댕기고, 너무산 메똥까 짠대기 파다가 들키가꼬 지게도 뺏끼뿌고 해사심미더. 그라민서도 지게 바잘개가 넘치도록 한그썩 지고와서 배껏마당 거튼데 산떠미 맹키로 모다가 태비를 맹그렀지예..

 

그때는 요시맹키로 화장지가 오데 있어예? 신문지나 조오쪼가리도 업서가꼬 통시깐에 가모 볏짚이나 새끼를 달아매놓고 뒤처리를 해꼬예, 우짜다가 호박잎사구나 감이파리로 똥구녕을 딱다가 그기 빵꾸가 나모 손가락에 묻어가꼬 낭패해하던 시절. 수굼포나 호메이로 땅에 파무끼도 했다아임미꺼.

 

-들 공부는 지대로 했게슴미꺼? 핵교끝나고 집에오기가 바뿌게 책보따리 던지뿌고 아무도 엄는 집에 삽짝문 걸어너코 소꼴케로 가야제, 소몰꼬 소매기로 산에 가야제, 옴마 아부지 들일하구로 동상들 델꼬 놀아야지예. 그라다가 동상들 배고파 울모 정지에가서 부뚜막에 안챠노코 살강에있는 보-쌀 쌀믄기라도 밥공지에 퍼서 찬짱에있는 물이맷국에 말아 미기던 그런때- 무슨 공부할 여가가 있었겠슴미꺼?

 

금방 밥묵고 뛰모 배 까바진다꼬 걸음도 살살 걸어라카고, 석유지름 애낀다꼬 공부그만하고 불끄고 빨리 자라고하던 이비기만 듣꼬 살았다봉께 시방 좋은시상과 너무 격세지감이 마이 들어 잠시 옛날 이박 함 해밨슴미더. 부끄럽꼬 미얀합니데이~!

 

 

  해  설  

 

내가 옛날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초근목피 라는 말 한 번쯤은 들어봤지요? 풀뿌리와 나무껍질. 곡식이 떨어졌을 때 먹는 험한 음식. 극심한 빈곤 상태를 의미. 옛날에는 쌀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었다고 하면 요새 젊은 사람들은 라면 삶아먹으면 되지요 라고 합니다. 감꽃 피면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하던 시집간 딸의 한 맻힌 절규가 감꽃 피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 춘궁기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친정어머니가 딸집에 와도 대접할 것이 없으므로 오시지 말라고 했다는 의미. 이때부터 생긴 말인 성싶습니다. 봄이 되면 양식이 다 떨어지고, 안 굶으려면 장려 쌀을 얻어먹던 그 시절에 8킬로 정도 되는 쌀 한 말을 장려 쌀로 먹으면 가을에는 한말 반을 갚아야 했습니다. 어지간히 산다는 집도 제사 때나 설날과 추석 양 명절이 아니면 쌀로만 지은 밥은 구경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무껍질로 만든 죽도 배불리 못 먹던 그때 쌀이 얼마나 귀했던지 쌀 한 낟알이라도 더 수확하려고 퇴비 만들기에 눈이 벌갰습니다. 개똥을 많이 주우러 다녔다는 말입니다. 약에 쓰려고 개똥을 주웠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때는 비료가 비쌌고, 참으로 귀했습니다. 퇴비 거름을 만들어서 비료 대신에 썼답니다. 퇴비 거름을 만들려면 소 마구간 바닥에 쇠스랑으로 보리 짚이나 볏겨를 깔아주고 소가 똥이나 오줌을 누면, 그걸 삭히고 썩게 해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소똥만으로는 퇴비 재료가 모자라서 보충을 하기 위해 동네를 다니면서 개똥을 주웠습니다. 개똥도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서,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부터 개가 많이 다니는 저 산마루까지 다녀야 개똥을 많이 주울 수 있었습니다. 저 건너 바깥마을 창녕작포마을 댁 남편은 아침 식전에 벌써 개똥을. 두 소쿠리나 주웠다는 이야기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소 마구간 바닥에 까는 보리 짚도 귀해서 산이고 들이고 풀이라는 풀은 다 베어서 거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새야 길가든 어디든 온 천지에 거름할 거리가 많지만 그때는 풀도 참 귀했습니다. 거름을 하기 위해 논두렁이나 남의 밭 언덕의 풀을 베다가 들켜서 도망 다니고, 남의 산 산소 주변의 잔디를 파다가 들켜서 지게를 뺏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게 발채가 넘치도록 많이 지고 와서 바깥마당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모아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화장지가 어디 있었나요? 신문지나 종이 쪼가리조차 없어서 화장실에 가면 볏짚이나 새끼를 달아놓고 뒤처리를 했습니다. 어쩌다가 호박잎이나 감잎으로 항문을 닦다가 거기에 구멍이라도 나면 손가락에 묻어서 낭패를 보던 시절이었지요. 삽이나 호미로 땅에 파묻기도 했답니다.

 

사정이 이러니 아이들이 공부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학교 끝나고 집에 오기가 바쁘게 책보따리 던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사립문을 걸어놓고 소 풀 뜯어먹이러 가야했습니다. 소 몰고 소먹이러 산에 가야지요, 엄마 아버지 들일 하시도록 동생들 데리고 놀아야지요, 그러다가 동생들이 배고파서 울면 부엌에 가서 동생들을 부뚜막에 앉혀놓고 부엌 선반에 있는 보리쌀 삶은 거라도 밥공기에 퍼서 찬장에 있는 오이냉국에 말아 먹이던 그런 때,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요.

 

금방 밥 먹고 뛰면 배 꺼진다고 걸음도 살살 걸으라고 했고 석유기름 아낀다고 공부 그만하고 불끄고 빨리 자라 고하던 이야기만 듣고 살았다 보니 오늘날 좋은 세상과 너무 격세지감이 많이 들어 잠시 옛날이야기 한차례 해봤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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