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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반하다

[사람에 반하다]쇳밥 먹으며 글 쓰는 청년 노동자 천현우

 

 

 

청춘 2막을 준비하는 시기에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전공과는 무관한 용접공이 됐다. 낮에는 용접면을 쓰고 눈부신 불꽃을 일으키고밤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솔직 담백하게 글을 쓰며 내일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청년 천현우(30) 씨를 만났다.

배해귀  사진 김정민

 

 


배우고 싶어 들어선 용접공의 길

천현우 씨가 용접공이 된 건 지난 2015년이다. 제조업종에 종사하며 조경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용접을 접했다. 아르바이트 당시 사수가 용접하는 모습을 어깨너머 보며 흥미가 생겼다.

용접이란 단어는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어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처음 용접면을 쓴 순간, 제가 얼마나 편견 덩어리였는지 깨달았죠.”

불꽃이 튈 때, 납땜과 전혀 다른 그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시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져 공장일과 아르바이트까지 겸했기에, 돈을 들여 기술 공부를 하는 건 도박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당시 정부에서 취업성공패키지를 운영하는 걸 알고, 고용센터를 통해 용접학원에 등록했죠.”

취업성공패키지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해 생계 유지가 힘들었다. 버스비도 아까워 매일 2시간씩 뛰며 학원을 오갔다. 용접산업기사 자격증을 준비하여 필기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문제는 실기였다. 하루 3시간의 연습으로 실력을 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실기에 떨어지면 다음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학원에 양해를 구하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결과는 92점으로 합격. 학원 등록부터 자격증을 따기까지 총 4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자격증을 받아 오던 날,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용접공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취재 당일도 야간근무를 서고 작업복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이한 천 씨. 그의 작업복에는 용접 불꽃이 튀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지난 4지방 청년의 생각’ SNS에 올려 공감대 형성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받은 상장도 제법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양하게 글을 썼어요. 저의 생각을 적은 SNS부터 순수 문학과 웹 소설 등 작가를 꿈꾸며 글을 썼죠. 10여 년 동안 공모전에도 여러 번 참여했지만 입상은 한 번도 못했어요. 그래서 글에는 재능이 없구나라고 생각 했죠.”

그래도 SNS에 자신만의 생각을 녹여 쓴 글을 일기처럼 쓰곤 했다. 그러던 중 지난 47일에 치른 재보궐선거에 대해 올린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고 공유 됐다.

당시 20대 남자들이 왜 민주당에 보복 투표를 던졌을까부터 해서 후보자들이 말하는 청년들은 왜 모두 수도권에 있는 취준생과 대학생들만 지칭할까. 수도권 외 청년들이 40%는 될 텐데 우리는 유령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썼어요.”

지방의 한 청년이 바라보는 현실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다

이후 그의 글을 읽고 관심을 보인 언론매체에서 연락이 왔고, 현재 3군데 매체에 투고하고 있다.

낮에는 철을 녹여 물건을 완성하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완성하죠. ‘경향신문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일기식으로 쓰고 있고, ‘피렌체의 식탁에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면서 보이는 문제점에 대해 쓰고 있어요. ‘미디어오늘에는 정치권 이야기를 현장의 청년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쓰고 있답니다.”

 

 

힘든 세상살이 겪으며 노동에 대한 인식 바뀌어

전문대 2학년 2학기 현장실습을 하던 첫날 그는 산재를 당했다. 대기업 하청업체였던 당시 회사는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다. 현장실습이기에, 겨울방학까지 근무를 해야만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출근한 첫날. 정확한 업무지시도, 안전장치도 없이 그저 선임자가 알려주는 방법으로 혼자서 일을 해야 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내부가 400가 되는 온장고를 열어 뜨거운 액체가 든 40kg짜리 원형 통을 꺼내 옮긴 뒤 금속 틀에 쏟아붓는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은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여 일을 했지만 통이 워낙 무거워 결국 붓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발에다가 그 뜨거운 액체를 쏟아버리고 말았죠.”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너무 놀라 발을 얼른 빼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회사 사람들이 뛰어왔고, 사장도 왔다. 그는 그때 본 사장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떨리듯 말했다.

괜찮니?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어요. 저를 동네의원으로 데리고 가 항생제를 맞혔죠. 회사에서 해준 건 그게 전부였어요. 이후 치료는 제 돈으로 해야 했어요.”

그렇게 그는 발목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산재처리는 고사하고, 뒷날 쉬지도 못하고 정상 출근을 해야 했다. 발목에는 몇 번이나 고름이 났고 몇 날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때 다쳤던 발목은 지금도 울퉁불퉁하다.

산재처리 방법도, 산업안전보건법도 배워본 적 없었어요. 만약 그걸 알았다면 치료를 좀 더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안전하지 않는 환경에서, 처음 해보는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일을 하라고 하죠.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꾸준히 글 써서 제조업 현실 알리고 싶어

지방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많이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똑같은 업무를 맡아도 왜 임금 차이가 그렇게도 많이 나는지, 더욱이 젊은 여성들은 성차별과 유리천장을 겪으며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현장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그 현실을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항상 이야기하는 숫자가 있어요. 8·40·250. 하루 8시간, 40시간 일하며, 월급은 최저 250만 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이 너무 많죠.”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자리 잡았으면 했다. 내일배움카드·내일채움공제·일학습병행제가 서로 잘 융합되어 청년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전 서울을 방문한 일이 있었어요. 제가 직접 용접한 전철이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용접공으로서 더욱 성장하고 싶고, 또 지금까지 썼던 글을 모아 책도 출판할 계획입니다.”

용접공과 작가로서 하루하루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천현우 씨. 제조업에서 일하며 지방 청년의 목소리를 더욱 내고 싶다는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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