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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가야유산 기획❼ 금관가야의 맞수, 대성동 VS 양동리 사람들

 

김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물으면 김해김씨, 김해공항, 김해평야라는 답이 대부분이다. 김해김씨는 전체 국민의 9%446만여 명(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으로 대한민국 최대 성씨이다. 김해김씨의 시조는 수로왕으로,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건국했다.

하지만 황금알에서 태어나 158세까지 살았다는 수로왕의 이야기는 가야를 전설 속의 나라로 만들었다. 1980년대도 김해가 금관가야의 중심지라는 유적은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뿐이었다. 가야를 한국 고대사의 한 축으로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봉황동 유적

1990년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이 발굴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열두 번의 학술발굴조사로 1~5세기 금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200여 기가 나왔다.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 말갖춤, 덩이쇠 등과 함께 주변국의 각종 귀중품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특히 2012년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의 7차 발굴조사에서 중국 중원의 한족과 북방의 유목민족, 왜와 관계된 금동제, 청동제 유물들이 나와 금관가야가 동아시아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증명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남쪽 500m에 봉황동 유적(사적 제2)이 있다. 이 유적은 대성동 고분군을 조성한 이들의 생활유적으로 봉황대의 북동쪽 평지에 금관가야의 왕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5년째 학술발굴조사 중이다. 그동안 가야시대 대형 건물지가 드러나고, 생활용 유물과 집모양토기, 뿔잔, 흙인형(토우) 등 모양토기들도 잇따르고 있다. 또 해반천이 흐르는 봉황대 서쪽에는 나무배의 조각과 물품보관용 창고(倉庫)의 흔적이 발견돼 금관가야의 항구가 여기에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과 봉황동 유적은 수로왕릉과 함께 금관가야의 최고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과 유하리 유적

대성동-봉황동 유적에서 서쪽으로 5거리에 양동리 고분군(사적 제454)이 있다. 1991년 발굴조사와 함께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2세기 중엽 조성된 양동리 162호분이 발굴됐다. 가야와 신라권역에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덧널무덤이다. 중국제 청동거울과 본뜬거울(倣製鏡), 다량의 철기들이 출토됐다. 여섯 차례의 발굴조사로 600여 기의 가야고분을 찾았고 대성동에 버금가는 문화수준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유하리 유적은 양동리 고분군의 남쪽 구릉에 있다. 유하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45)으로 알려져 있지만, 양동리 고분군을 만든 이들의 생활유적지이다. 2015년 정식 학술조사에서 패총 일부가 처음 발굴됐는데 유하리 유적은 단순한 쓰레기장이 아니라 대지 조성용 패각층으로 밝혀졌다. 현 정부 들어 가야사 연구복원지원에 따라 유하리 유적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김해시는 유적의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시굴조사를 벌여왔고 올해 4월까지 주거시설과 패각층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촘촘한 벽기둥(壁柱)과 흙벽 건물지와 지상식 주거지 등 다양한 주거시설이 있는 가야시대 마을이 확인됐다. 3~4세기 가야토기에 이어 바늘, 빗 등 뼈로 만든 다양한 생활도구들도 출토돼 가야인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됐다.


대성동과 양동리, 맞수에서 운명 공동체로

금관가야의 전성기인 3세기 말부터 5세기 전엽까지 중심 지배집단은 대성동봉황동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양동리 고분과 유물이 대성동보다 훨씬 뛰어나 금관가야 초기 중심지를 양동리유하리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물론 대성동봉황동이 처음부터 중심지였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그런데 5세기 중엽 대성동과 양동리 모두 고분의 규모가 축소되는 모습은 흥미롭다. 지난 400년 이른바 고구려의 남정(南征)에 금관가야의 두 중심집단이 함께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성동양동리 사람들은 시작은 맞수였지만, 꺼져가는 금관가야 앞에서는 운명공동체였던 것이다.

최근 가야문화권 지자체들이 그렇듯 김해에서도 중요 가야유적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군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발굴할 예정이다. 이 두 고분군은 매번 가야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고고자료들을 쏟아 내었는데, 이번에도 맞수의 면모를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심재용 김해시 가야사복원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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