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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화과원 유허지 사적 지정을 기원하며

8·15광복절 특별인터뷰 혜원스님 두 번째 이야기

 


 

! 혜원스님이 입적하셨다고요?”

지난 6월 퇴근길에 혜원스님의 안부를 묻기 위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자동음이 들려왔다. ‘011’ 쓰시더니 드디어 ‘010’으로 바꾸셨나보다 했다. 어쩔 수 없이 보현사(산청군 생초면)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공양주인 무진성(無盡性) 보살로부터 주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벌써 49재까지 마친 터였다.

[3·1운동 100년 특집]을 준비하던 지난 2018, 기미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선사의 화과원(華果院, 함양 백운산)을 취재하면서, 백 선사의 손상좌인 혜원스님을 처음 만났다. 화과원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자금을 댄 의찰(義刹)이다. 그런데 6·25한국전쟁 과정에서 16동 건물이 모두 불에 탔다. 이 가운데 법당인 봉유대를 지난 2004년 혜원스님이 복원했다. 그 이후 2017년 백운산 일대 13709가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화과원 유허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이기도 하다.

 

입적 전날까지 영은사 불사에 공력

오는 광복절을 앞두고 지역사회의 오랜 숙원인 화과원 유허지 국가 사적 지정 문제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에 산증인인 혜원스님이 계시지 않는다니 세상사 참 모를 일이다. 종교는 서로 달랐지만 설익은 종교인이 아닌 참 스님을 만났구나싶었기에 어쩌면 사심(私心)까지 담아보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지난달 초 스님이 마지막 불사를 했다는 백운산 자락 영은사(永恩寺)를 거쳐 보현사를 찾아갔다. 추적추적 빗소리에도 인기척을 느꼈던지 고적하던 선방의 발이 걷히고 무진성 보살이 아는 체를 했다. 뜻밖의 말을 건넨다. “스님이 편집장님을 참 좋아하셨는데말끝이 흐려질수록 미안함은 깊어졌다. “20년 인연으로 스님을 모셨지만, 무엇 하나 당신을 위해 쓰고 남기신 것이 없다며 허전함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미안함을 무릅 쓰고 스님의 마지막을 물었다.

지난 227일 저녁까지 영은사 공사를 하셨고 몸이 이상하다 하셔서 119를 불렀죠. 응급실에서 다음날 그만 입적하신 겁니다. 의사는 과로사로 판정했어요.”

 

화과원 사적 지정은 내 일생의 업

혜원스님을 문디 스님이라고 부른다. 왼손가락 4개가 없다. 신체의 일부를 태우는 소신공양을 하신 까닭이다. 손가락을 태우는 연지(燃指) 공양을 할 때도 원칙이 있다. 일정 마디까지만 타도록 장치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스님은 그냥 태웠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왜 그러셨냐?” 물었더니 잘 타나 보려고 그랬다던 기억이 새롭다.(경남공감 20188월호)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화과원 봉류대를 복원하던 당시 자금이 모자라면 석공들을 다 보낸 뒤 스님이 직접 돌을 깨고 다듬었다 한다. “그 남은 엄지 하나로 연장을 쥐고 작업하시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균형을 잃고 석축 아래로 추락한 적도 있어요. 모자라는 인건비를 스님이 몸소 해결하려다 그런 거였죠.”

백운산 입구에는 예전에 없던 부도탑이 하나 서 있다. 화과원 유허지 전체가 훤히 보이는 위치다. 지난 49재 때 보현사 신도들의 재보시로 세운 제월당 혜원스님의 부도탑이다. “화과원 유허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받아 독립운동정신을 교육하자했던 스님을 기리는 마음에서다.

 

10월경 화과원 유허지 사적 신청 여부 심의

화과원 유허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으려는 움직임은 지난 2005년부터 구체화됐다. 혜원스님이 화과원 요사채인 봉류대를 복원한 직후다. 지난 2015년에는 국가 사적 지정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이후 화과원 백자 가마터 발굴조사, 전문 용역 및 동국대 등과의 업무협약이 추진됐다. 올해 8월 현재 경남연구원의 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오는 10월경 경남도 차원의 사전 심의를 통과하면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요청할 계획이다.

혜원스님의 영결식이 열리던 날은 3·1, 원적에 드신 지 100일째 100재를 올린 날은 또 66일 현충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 했던가? 스님의 우국충정이 국가 사적 지정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사진 최석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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