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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박재혁·조재석 씨가 돌아보는 '경남의 6·10 민주항쟁'

 


 

오는 10일은 제34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일이다. 6월항쟁은 1979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이다. 1987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 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남에서도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이어졌다. 1987610. 경남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87610일 오후 3시 경남대학교 10·18광장. 50여 명의 학생들이 군사정권 호헌 철폐 집회 출장식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에 당시 경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재혁(당시 경남대 3학년·60) 씨는 중앙도서관으로 올라가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학우 여러분, 지금은 펜보다 돌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함께 투쟁합시다. 배열에 동참합시다. 총학생회장인 저는 끝까지 투쟁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박 씨의 절실한 호소에 400~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을 때 출정식 장소 인근에서 차량 한 대가 불탔다. 바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현재 국가정보원) 학내 사찰요원의 승용차였다. 검은 연기가 학교 안을 휩쓸면서 더욱 많은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렇게 1000여 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민주화의 상징 3·15의거탑을 향했다. 하지만 경찰은 3·15의거탑 주변 출입을 차단하고 집회를 원천 봉쇄했다.

당시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조재석(당시 창원대 2학년·55) 씨는 “3·15의거탑이 막혀 그 인원들이 마산시내로 진입했고 마산종합운동장으로 향했어요. 운동장 근처에서 경찰과 시위대는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고, 서로 투석전과 최루탄 발사로 맞붙었죠.”

그때 당시 마산종합운동장에서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준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경찰들이 쏜 최루탄이 경기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결국 경기는 중단됐다. 전국으로 중계되던 경기가 생방송 중에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 축구경기의 중단으로 당시 관중들과 tv를 시청하던 운동장 인근 주민들도 거리로 뛰어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경찰은 연좌농성을 하는 시위대에 최루탄으로 대응했지만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날 마산 시내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전국 동시다발적인 시위와 함께 시작된 경남의 시위는 6·29특별선언(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언)이 나오기까지 6월 민주항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조 씨는 당시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수백만의 국민들이 민주항쟁에 참가했어요. 이후 6·29선언이 나오면서 굉장히 허무했어요. 그해 12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정권 교체가 이뤄지지 않아 아쉬운 점이 컸죠라고 말했다.

어느새 34년 전인 19876. 박 씨는 6월항쟁이 삶의 전환점이 됐다. “졸업 이후에도 마산자유민주청년회·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에서 활동했어요. 무엇보다 6월항쟁을 통해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또한 박 씨는 6월항쟁이 시민의식 성장의 계기가 되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는 민주주의. 6월항쟁뿐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민주화 운동을 통해 얻어낸 국민의 권리라는 걸 다시금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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