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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가야시대에는 어떻게 토기를 만들었을까?

 

4~5세기 가야 사람들은 어떻게 토기를 만들었을까?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창녕군 창녕읍 퇴천리에서 발견됐다.

 당시 가야인들의 손길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에 대해 알아보자.

배해귀 사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 김정민

 

 

국내 최대 규모의 가야 토기 가마터

지난 2019년 창녕군 퇴천리 토기 가마터 발굴 현장에서는 길이 15m, 너비와 깊이가 2.3m에 달하는 대형 땅굴 같은 토기 가마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1500년 전 가야인들이 토기를 굽던 가마터가 발굴된 것이다. 가마는 흙으로 빚어 만든 토기·옹기·자기·기와 등을 굽기 위해 땅을 파거나 지붕을 덮어 씌어 만든 시설로, 가마의 흔적이 남은 곳을 가마터라고 한다. 경남에는 현재까지 가야시대 토기 가마터로 보고된 유적은 총 40여 곳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야시대 토기 가마터 중 가장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고, 규모 역시 고대 삼국의 것과 비교할 때 국내 최대 규모로 확인되었습니다.”

퇴천리 토기 가마터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김정호 조사과장이 발굴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마 천장부, 당시 가야인 손자국 남아 있어

길쭉한 모양의 토기 가마터는 토기를 생산하면서 생긴 폐기물과 재가 쌓인 회구부(灰丘部)’, 땔감을 넣어 불을 지피는 공간인 연소부(燃燒部)’, 흙으로 빚은 토기를 굽는 공간인 소성부(燒成部)’,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도부(烟道部)’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가마는 무너지거나 훼손된 경우가 많은데 퇴천리 토기 가마터는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무엇보다 퇴천리 토기 가마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천장부(天障部)’이다천장 구조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보통 가마에 불을 때면 천장이 불을 받아 균열이 생기거나 표면이 떨어집니다. 심하면 무너지기도 하고요. 때문에 토기를 계속 구워내려면 천장 내면을 보수해야 하는데, 이때 진흙에 섞은 짚흔과 함께 가마 장인들의 손자국()이 뚜렷하게 확인되었어요. 가마를 계속 보수하면서 사용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토기 가마 유적에서는 천장부의 두께가 20~50cm 내외로 얇지만, 퇴천리 토기 가마는 이에 비해 10여 차례 이상 보수하면서 130cm나 되는 천장이 확인된 국내 유일한 토기 가마이다. 김 조사과장은 이러한 가마 보수흔적이 일본 오사카 쓰에무라(陶邑) 고요지군(古窯址群)의 스에키(須惠器) 토기 가마에서도 다수 확인된다는 점에서 창녕 지역의 가마 축조기술이 일본에 공유되거나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죠라며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가야시대 생산유적 중 경남도 문화재로 첫 지정

퇴천리 토기 가마 내부에서는 큰항아리, 짧은목항아리, 그릇받침, 뚜껑, 굽다리접시 등 4세기 후반~5세기 초의 가야 토기 190여 점이 출토됐다.

 

큰항아리의 출토 비율이 가장 높아 당시 가마에서 저장용 그릇인 큰항아리를 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항아리는 제작 공정상 여러 부위로 나누어 만든 후 접합하는 등 성형과 소성이 매우 까다로운 기종입니다. 당시 창녕 지역 비화가야인들이 가진 토기 생산 기술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거죠.”

이는 대규모 요업 시설을 갖춘 비화가야인들이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량의 토기를 생산·공급했으며,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비화가야인들의 생활상 복원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역사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 다양하고 중요한 가야문화상을 간직한 창녕 퇴천리 토기 기마터는 지난 2월 가야시대 생산유적 중에는 처음으로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며, 당시 발굴했던 벽체 중 일부는 창녕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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