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본문기사 바로가기

도민의 소리

[도민의 소리]민족의 음식은 남자도 같이 만듭시다

시인 백석은 <국수>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눈을 헤치며 동무들과 함께 잡은 산꿩을 꾸미로 삼아 어머니가 해주시던 냉면을 그리워했다. 그 냉면이 담긴 육수는 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에다 얼얼한 댕추가루(고춧가루)’를 푼 것이었다.

백석이 노래한 건 어린 시절 추억의 음식을 그리워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인은 눈발처럼 계속 이어지는 국수가닥의 모양새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로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을 노래했다.

물론 이제 냉면은 더 이상 집에서 온전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며, 아이들이 꿩을 잡겠다고 산에 올라갈 일도 없다.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20년대 당시에 냉면 만드는 방법은 100년이 지난 이 시대 밥상에서도 비슷하게 대물림하여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쩡하게 익은 동치미국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백석의 시는 100년 전의 맛을 언제라도 당장 우리 눈앞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또 있다. 백석이 살던 평안북도는 한반도에서 추위가 가장 매서운 지역 중의 하나다. 시인은, 한겨울 그 추위 속에서 시린 손으로 차가운 냉면을 만들고 미리 동치미 김치를 담가둔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산꿩 잡기 위해 산을 헤맨 자신만큼 부각하지는 않았다. 냉면을 만들어준 가난한 어매를 그저 별일 아니고 당연하다는 듯이 슬쩍 언급하고 넘어갔다.

이런 식의 전통도 지금의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세상 많은 것이 바뀌어도 유독 김치를 포함한 음식 만들기만큼은 여성이 전담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초겨울만 되면 관공서나 사회단체들은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하여 대량의 김장을 담그는 행사를 벌인다. 추위를 무릅쓰고 많은 여성들이 합동으로 배추를 주무르는 풍경에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자랑할 만한 미풍양속이라는 자부심도 곁들여지지만 참여자는 대부분 여성 일색 이다.

또 각 가정은 그들대로 고민이다. 올해는 내 손으로 김장을 담글 것인가, 사먹을 것인가. 식구가 적고 힘도 드니 사먹고 말고 싶지만, 시가에서 산더미 같은 김장을 하자고 부르면 젊은 여성들은 고민이 시작된다.

단언하건대 음식 만드는 노동에 남자도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된 세상이라면 김장문화부터 확 바뀌었을 것이다. 김장 문화는 아예 소멸되었거나 김치는 사먹는 음식으로 당연하게 생각됐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전담노동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아니라면 많은 점이 달라졌을 것이다.

김치에 대해 민족의 음식이라는 찬사가 바쳐지는 것도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워 여성의 전담 노동으로 고착해두고 싶은 사람들의 의도가 관철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김치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기에는 그리 오래 된 음식도 아니다. 백석 시인 시절의 김치만 해도 싱겁고 삼삼했으며, 지금의 우리는 고춧가루에 파묻힌 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알지만, 중국 농산물이 들어온 1990년 이후에야 시뻘건 김치가 가능해졌다.

음식을 위시하여 민족이니 전통이니 하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당연한 듯 떠넘겨진 것들은 대개 남자들은 꺼리는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세상이 눈부시게 바뀌고 있지만, 어떤 부분은 완강하게 전통이라는 이름의 유습이 자리잡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정문순 (창원시)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