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를 따지는 명나라 진영

각 나라의 정세
  • 임진왜란 막바지에서 조선, 명, 일본은 각기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조선은 일본 의 침략에 큰 아픔을 겪고 있었으며, 파병 온 명군의 행패로 멍이 들어 있었다.
    종전을 앞둔 명나라와 일본의 속셈과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을 자세히 알아보자.

실리를 따지는 명나라 진영

조선에 파병을 한 명나라의 의도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명나라는 정유재란 이전에 이미 파병[派兵군대를 파견함]을 결정한 상태였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위급함을 알게 된 명나라는 정유년에 장수 계금이 이끄는 수군 3,200명을 먼저 파병하였으며 본격적인 파병은 1598년 1월 20일경 부터 시작되었다.
실추된 명나라의 위신을 회복하고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는 사로병진[四路竝進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는 것]작전을 계획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8년 6월 중순 도독 진린과 군사 5,000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7월 16일 고금도 통제영에서 이순신 장군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 작전으로 공격지점에 따라 크게 4개의 군대로 나누어 수륙합동 작전을 세웠다.
동로군은 명나라 제독 마귀가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중로군은 제독 동일원이 사천의 시마즈군을, 서로군은 제독 유정이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군을 수로의 도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협공하기로 했다.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 계획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 계획

일본군을 소탕한다는 사로병진책은 대단했지만 계획과 같이 큰 성과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에 보낸 지원 병력은 3만 290명이고, 노량해전에 참여한 병력은 1만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사로병진(四路竝進)의 전술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