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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nam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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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12. 분할된 색면의 울림, 한국적 기하 추상의 지평을 넓힌 작가, 이준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4-02-14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수장고에는 작품 1300여 점 이상이 보관돼 있다. 전시 작품을 구매하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도내 작가 작품을 사들인 결과다. 하지만, 아쉬운 건 도대체 수장고 안에 어떤 작품이 들었는지, 일반인이 쉽게 알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립미술관 학예사를 통해 수장고 작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로 했다. 글과 사진을 통해서지만, 이렇게라도 하면서 수장고 관리 문제에서부터 도민들과 작품을 공유하는 방법까지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

 

작가 이준(李俊·1919~2021)은 1919년 남해군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며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39년 일본에 건너가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아 마산으로 귀국한 후 70여 년의 화업을 일군 경남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한국적 기하 추상을 지속해서 실험한 작가다. 기하 추상화는 빛의 파편과 같은 분할된 색띠와 색면의 반복이 조형적 특징이다. 아마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광을 보고 자라난 작가의 유년 시절에 그 기원이 있지 않을까. 남해는 망망대해를 접하고 있다. 그가 보았던 남해의 자연 위 내리쬐던 빛과 그림자들처럼, 작품에서는 다양하게 분할된 색면의 율동감이 화면 밖으로 뚫고 나와 넘쳐흐른다. 이러한 반복적인 원과 선, 색면과 색띠들은 율동감, 리듬감이란 조형 원리를 형성하여 독특한 울림을 주는 서정적 기하 추상 세계를 이룩했다.

 

이준은 실제 대상을 표현하는 구상 회화에서부터 조형 요소와 원리만을 활용한 순수 추상회화까지 꾸준히 탐구와 실험을 했다. 시기적으로는 1950년대까지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상화를 다수 제작했으나, 1957년 몇몇 작가들과 창작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당시의 특정 경향이나 이념을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순수 창작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는 앵포르멜1) 경향의 서정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보인 추상회화를 시도했다. 1970년대 이르러 본격적으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기하 추상 작업을 시작하여 한국미술계의 지평을 넓혔다. 서양에서의 기하 추상은 몬드리안부터 하드엣지 페인팅2) 등의 차가운 추상으로 분류된다. 기계적인 붓질과 같은 빈틈없는 색면, 칼날로 깔끔하게 도려낸 듯 명쾌한 형태의 기하 추상은 우리의 한국적 정서의 기하 추상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한국적인 자유로운 서정성을 품은 기하 추상에서는 자유로운 곡선과 빛의 산란과 같은 색의 변주 등이 하나의 색면 안에 담겨 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서정적이지만 기운생동(氣韻生動)3)하는 기하 추상이다.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잔영'은 1978년 작으로, 이준이 1960년대 앵포르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구사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잔영은 ‘희미하게 남은 그림자나 모습’을 뜻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어떤 풍경이나 대상을 희미하게 남은 그림자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이는 구상과 추상의 회화적 실험을 위한 중간적인 형상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구상화가 실재하는 대상을 정직하게 형상과 형태를 살려 표현하는 것이라면, 추상화는 형상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기보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이나 정서를 점·선·면·색 등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의 질서와 변주를 통해 자유롭게 표현한 것을 말한다.

 

작품 제목으로서 잔영을 통해 작가가 추상을 위한 추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대상을 자신의 조형적 미감으로 추상적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다채로운 기하학적 색면과 색띠 등의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연두색, 남색 등 녹색에서 청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중간색채 변주를 표현하여 서정적인 기하 추상의 분위기를 담아낸다.

 

작가는 당시 한국적 기하추상의 그룹인 오리진4) 그룹에 속하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기하 추상 작업을 꾸준히 실험한 작가로서 경남의 대표적 추상화가이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프랑스의 오르피즘5)처럼 리듬감, 율동을 통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경남 남해의 섬들로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내재된 율동감의 조형이 작품의 차원으로 풀려난 것 아닐까. 그의 작품을 보면 멈춰있는 추상화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기하 추상이다. 이는 분명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시각적 율동감을 느끼게끔 한다. 바로 이런 생동감 넘치는 울림이 있는 기하 추상화는 분명 이준 작품의 매력이다.

 

/김주현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각주

1) 앵포르멜은 프랑스어로 ‘비정형(非定形)’이란 뜻이며, 기존의 모든 회화 개념 및 소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에 억눌린 인간 내면의 극한성을 실존주의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했다. 전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개된 서정적 추상화의 한 경향이며, 이후 국제적 미술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2) 하드엣지 페인팅은 미국에서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당시 유행하던 주정적인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기하학적 추상 경향을 말한다. 거친 질감을 없앤 정교하고 깔끔한 붓질, 기계적인 느낌의 딱 떨어지는 기하학적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3) 기운생동은 표현된 바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것.

4) 오리진은 우리나라에서 1962년에 조직된 미술 단체로,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기하학적 형태와 구조의 조형언어를 추구했던 그룹.

5) 오르피즘은 입체주의의 분파로, 시적, 음악적 율동성 등을 특징으로 하며 그리스 신화 속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 이름에서 유래했다. 빛의 유동성을 기하학적인 추상 형태로 표현하여 음악적 리듬감을 지닌 생생한 색채의 기하학적 추상화 경향이다.

 

※참고문헌

1. 오창준, <이준 자연의 빛으로 엮은 추상>, 컬처북스, 2007.09.20.

2. '경남도립미술관 명작 둘러보기(4)', <월간 경남>, 2020년 10호

3. 안연희 엮음, <현대미술사전>, 미진사, 2011.08.25.

4. 월간미술 엮음,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7.01.31.

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정보 https://www.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DetailPage.do

 

 

 

이 보도 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경남도립미술관 운영과 김주현 학예연구사(055-254-4634)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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