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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nam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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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11. 샤머니즘적 조형과 서체 추상의 정수, 유택렬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4-02-14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수장고에는 작품 1300여 점 이상이 보관돼 있다. 전시 작품을 구매하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도내 작가 작품을 사들인 결과다. 하지만, 아쉬운 건 도대체 수장고 안에 어떤 작품이 들었는지, 일반인이 쉽게 알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립미술관 학예사를 통해 수장고 작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로 했다. 글과 사진을 통해서지만, 이렇게라도 하면서 수장고 관리 문제에서부터 도민들과 작품을 공유하는 방법까지 멀리 내다보고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

 

유택렬(1924-1999)은 함경남도 북청 출생으로 북청농업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사촌형이었던 유강렬(1920-1976)1)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본격적인 미술활동에 돌입하며 이중섭, 한묵, 도상봉과 교류를 지속하는 등 예술에 대한 기량을 쌓아왔다.

 

1951년 1·4 후퇴 때는 가족 일부와 월남하여 거제, 부산 등을 거쳐 진해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는 1943년 일본해군에 강제 징집되어 진해에서 군복무를 하며 지냈던 인연과도 연결된다. 그렇게 정착한 이후에는 작고 직전까지 45년간 진해에 머물며 지역 예술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활동들과 함께 자신의 예술세계 탐구를 지속해 왔다.

 

1955년부터는 진해중, 진해충무중, 진해고, 진해여중, 진해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다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1969년 교직을 그만두었는데, 이후에도 후학 양성과 미술계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독려하며 그 행보를 지속했다.

 

1962년(또는 1963년)에는 진해 칼멘다방을 인수하여 지금의 흑백다방을 열었고 음악과 미술, 문학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꾸려나갔다. 이외에도 진해군항미술제 집행위원, 각종 미술 단체를 이끌었으며 경남미술인상, 경남도문화상 등을 수상하며 지역 미술계에 중심 역할을 이어왔다.

 

유택렬은 이렇듯 교육자, 예술행정가, 예술인들의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 운영을 도맡아 왔지만 그 무엇보다 열과 성을 다한 것은 바로 예술가로서 자신의 내면과 조형세계에 대한 탐구였다. 이는 그가 남긴 수많은 유화 작품, 먹 드로잉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시기별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 심화해 왔다.

 

월남 이전 여러 화우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작업을 이어오던 중 갑자기 닥친 전쟁과 피난 등의 상황은 이후 유택렬의 가슴 한편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고, 동족상잔의 상흔과 북에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초기 작품에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월남 이후 60년대 이전까지의 작품은 주로 어두운 색조와 반구상 형태의 조형으로 동란으로 빚어진 상처를 드러냈다.

 

1957년 첫 개인전을 열던 시기부터는 어린 시절부터 심취해 오던 추사의 조형, 무속신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토속적 골동품을 수집하거나 다양한 이념적 연구로 이어진다. 그런 중에도 서양 현대미술의 새로운 조형에 대한 관심을 열어두고 개방적인 자세로서 우리 전통과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 초 결혼과 자녀의 출산을 전후로는 보다 다채로운 색감이 등장하며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샤머니즘적 조형, 이후 심취했던 서체 추상의 원형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탐구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보다 심화되고 확장되어 갔다. 특히 1981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과 1990년, 1991년의 프랑스 파리 개인전을 통해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정착해 나아갔다.

 

“나는 처음부터 원시 미술과 샤머니즘에서 우리 조형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 용에서부터 고인돌, 점, 단청, 부적, 불교미술 등은 내가 헤맨 분야들이다. 처음에는 점차 이미지에 접근해 가는 방법을 사용했고, 근자에는 무의식 상태의 조형을 많이 사용하는 셈이다. 앙폴멜과 우리의 서나 부적은 근이 한 듯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샤머니즘의 본질은 살(煞)이며 부적이 동물적 본성의 소산이라면 추사의 작품들은 인간적 지성의 부적이다.”  (1981년 작가노트 중에서)

 

1960년 작인 '작품 60-L'은 초기 전쟁의 상흔을 반구상적 형태로 표현했던 작품 이후 보다 밝은 색채들이 등장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당시 작가는 토속적 민예품과 서양 앵포르멜 회화에 심취해 있었다. 이 시기 유택렬은 송혜수, 조동벽, 염태진, 나건파, 강신석 등과의 교류를 가지며 예술의 본질을 앵포르멜적인 방법으로 잡아내려 했고, 이는 훗날 그의 조형적 특질인 서예와 샤머니즘의 조형적 성과인 부적과 같은 형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화면 전면에서 보이는 거친 붓질과 곳곳에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 이의 전반을 이루고 있는 검정, 빨강, 노랑, 군청 등의 원색들은 화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백색의 형상을 통해 중심을 잡고 있다. 여러 흐름들만 짐작할 수 있는 화면 전면의 붓질과 중심의 둥근 형태는 아마도 어린 시절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들린 듯 부적을 써서 자신의 복통을 치료해 준 주술가의 행위를 바라본 경험의 영향과 동란 이후 복잡했던 당시의 내면을 전통 색채와 거친 붓질로 쏟아낸 듯 보이며, 이후 천착했던 샤머니즘적 조형과 서체 추상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박지영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각주 

1) 유강렬(1920-1976)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예 및 건축을 전공하였으며 귀국 후 염색공예가, 판화가, 홍익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사촌 관계인 유택렬과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며 유택렬의 예술 활동 초기 이중섭, 한묵 등과의 교류를 주도하였다.

 

* 참고문헌 

1. 김미윤 〈본성으로의 回歸(회귀)와 葛藤(갈등) -유택렬의 符籍(부적)을 중심으로〉, 박석원 〈유택렬의 예술가적 생애〉, 윤진섭 〈서체추상과 무속적 미의 세계〉, 황원철 〈6·25 피난작가 유택렬의 예술혼〉, 〈2005년 하반기 학술세미나: 유택렬의 삶과 예술〉 경남도립미술관, 2005

2. 경남도립미술관 전시도록 〈유택렬: 샤머니즘적 조형언어〉 경남도립미술관, 2005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가정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이 보도 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경남도립미술관 운영과 박지영 학예연구사(055-254-4638)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00799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11. 샤머니즘적 조형과 서체 추상의 정수, 유택렬 저작물은 자유이용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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