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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역사 아로새겨진 단성사직제 봉행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1-아래에서 바라본 사직단 산전경산청 단성면 사월리 산에 있는 단성사직단을 시목정 마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작년 이맘때다. 진주사직단을 한창 호기심을 갖고 조사하던 중 단성사직단을 찾게 되었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단성사직단에서 사직제를 올린다고 하기에 작년 처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사직제일이 단성향교 석전제 올리던 다음 날인 걸 알았다.

지난 9월 19일 새벽 6시 지리산 경계인 경호강에 걸린 단성교를 건너 단성농협에 다다랐다. 여기서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지나 사직단에 당도하였다. 마을 주민들과 제관들은 제단과 제물을 차리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사직단이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말한다. 조선 초기에 전국의 현 이상 지역에 걸쳐 설치하였던 3단(성황단, 여제단, 사직단), 1묘(문묘: 향교) 중 경남 지역에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산청 단성사직단이다. 일제가 전국 군 단위 이상의 지역에 신사를 설치하면서 우리 문화는 미신이라며 일제히 파괴하였고 향교만 유림의 반대로 살아남았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2단성사직단 입구의 계단, 사직단 담장 및 유문, 축대와 잡석, 그리고 해묵은 주변 소나무들이 마을을 수호한 듯 꼿꼿이 서 있으며, 그들 또한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단성사직단은 산청 단성면 사월리 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성면 소재지에서 천계, 울리로 가는 지리산 방향으로 난 새고개를 넘으려 하면 중간에 시목정 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 남쪽에 나지막한 산에 있다.

단성사직단은 제단의 위치, 제단의 축조 방식이나 제도적 규식 등을 보아 조선왕조 초기에 건립된 지방 사직단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동, 서, 남 세 방향은 제단의 형태가 완연히 남아있고 각각의 방향으로는 중간에 3층으로 이루어진 섬돌의 모습이 남아 있다. 도 기념물 제255호(2005년)로 지정되어 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3사단과 직단, 신실이 있는 터에 자리 잡은 사직 신실, 사직단에서 내려다본 시목정 마을 등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조선왕조 초기에 조성될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직단이며 봉안하고 있는 사직신 위패 2점 또한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보존 상태가 좋아 제단의 위치와 축조 방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제단은 동⋅서⋅남 세 방향의 제단이다. 각 방향의 중간에는 3층으로 이루어진 섬돌이 있다. 오래된 소나무가 주위를 꽉 메우면서 옛 정취를 그대로 풍기고 있어 역사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사직단의 뒤쪽에 지신과 곡신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사당 아래쪽에 사단과 직단이 있다.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이다. 전근대의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바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직제는 고대부터 시작되었고 유교적 통치이념을 내세웠던 고려시대 이후로는 그 의례의 정비를 통해 중요한 국가 제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구현하면서 민생의 안정을 사직제의 상징성에서 찾음으로써 그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4사직단 제단과 향례의 축문, 향례 홀기, 그리고 집례의 창홀 모습이 다른 향례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드디어 사직제가 시작되었다. 초헌관으로 김영길 산청군농협조합장, 아헌관으로 박성종 신안면장, 종헌관으로 산청군농협 이병학 이사로 분정되었다. 또 집례로는 단성향교 이병관 장의가 분정되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5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창홀과 헌관들의 진지한 분위기는 향례를 더욱 의미 있게 하고 있으며, 현사지신, 현직지신 위패는 엄숙한 제의를 더하고 있다.

시작을 알리는 창홀부터 개시되었다. 향을 피우고 바구니를 올리는 순서로 전폐례가 이어졌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6향을 피우고 바구니를 올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축문을 읽는 독축과 사직단 제단의 모습 등이 진지한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고 있다.

다음으로 초헌관이 첫 번째 술을 드리는 행초헌례와 축문을 읽는 독축이 진행되었다. 아헌관이 두 번째 술을 드리는 행아헌례, 그리고 종헌관이 세 번째 술을 드리는 행종헌례가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폐백과 축문을 불살라 재를 땅에 묻는 망요례까지 옛 모습 그대로 봉행되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7-초헌례초헌관이 첫 번째로 술을 드리는 순서인 초헌례를, 집례가 부르는 홀기 순서에 따라 엄숙한 제의를 올리고 있다.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집례의 홀기를 따르는 창은 제단의 신성한 기운과 함께 야트막한 산골을 꽉 메우는 느낌 그대로였다. 군민의 안녕을 빌며 영화와 평화스런 삶을 염원하는 분위기로 끝을 맺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8아헌관이 술을 드리는 아헌례와 종헌관이 드리는 종헌례, 축문을 불사르고 향례를 마무리하는 망요례, 그리고 축 이하 집사가 네 번 절을 하고 있다.

단성향교 문승열 전교는 단성사직단에 대해 안내하였다. 단성사직단의 최초 설립 기록은 없으나 단의 형태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조선왕조 초기에 전국의 많은 사직단이 설립되든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1908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칙령으로 전국의 제단이 철폐되고 제향이 끊어졌는데도 유일하게 단성사직단은 중단 없이 존속되며 제향이 600여 년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다.

사직단수호 시목정위원회 권재만 사무국장은 “일제 행정의 간섭이 심할 때에는 사직단이 있는 마을 가정집에서 이른 새벽 불빛을 가리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며, “제수 경비를 위하여 마을 앞 하천부지를 개답하여 그 토지가 현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9-헌관이하네번절헌관 및 헌관 이하 자리에 있는 모든 제관들이 네 번 절하면서 동민의 화평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사직단수호 시목정위원회 권영혁 위원장의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단성고을 주민의 소박한 심성이 바탕이 되고, 특히 사직단 소재 동네 주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사직단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다. 그 시작의 중심적 역할을 하신 분은 사직단 소재 동내 대유학자 송강 권창용 선생의 지도가 있었고 그 후 당시 단성면 행정에 몸담아 단성면장을 지낸 노암 권우용 선생의 헌신적인 애착이 강했다. 현재는 구암 권재석 선생을 중심으로 전 동민이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사직단 수호 관리와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경상남도에서 2007년 주변 원장공사를 7000여만 원을 들여 조성했으며, 사직단 주변 1만 6000여㎡ 산은 동네주민 30명의 공동명의로 등기되어 있어 주변 환경을 수호·관리하고 있다. 현재 음력 2월, 8월 초무일 매년 2회 단성향교 대제 다음날 제향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물 준비는 시목정 동내주민이 하고 군청과 농협에서 경비를 후원하며, 단성향교가 주관하여 향례를 올리고 있다.

이 같은 제례문화는 오늘날 자연과 인간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걱정하는 민심을 바탕으로 서서히 복원되어가는 농경민족의 문화로서 그 의미가 크다. 이런 현실에서 단성사직단 제향이 유일하게 600여 년을 이어온 것은 전국에 드러낼 자랑거리라고 생각되며 앞으로 더욱 공고히 계승, 발전시켜야겠다고 동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10-홍살문 단성향교전경단성사직제를 주관하고 있는 단성향교를 홍살문 쪽에서 바라본 전경이 위엄스럽고 고귀한 자태를 풍기고 있다.

단성향교 문 전교는 단성향교의 역사와 문화에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단성사직제를 주관하고 있는 단성향교는 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62년 임술민란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고려 인종 때(1127)에 지은 후 조선 세종 때 서쪽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영조 28년(1752)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경사지에 위치하여 앞쪽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정문인 관선문을 들어서면 누각형식의 명륜당이 있는데, 대청 아래를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명륜당 밑을 통하여 내삼문과 대성전의 지붕이 겹쳐서 보인다.

강당인 명륜당이 누각형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정문을 평대문으로 처리하였으며, 대문의 양 옆으로는 긴 행랑채를 이루고 있다. 명륜당의 뒤쪽 좌우에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였다. 일반적인 향교와 달리 양재가 명륜당보다 안쪽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뒤쪽에 있는 내삼문 쪽이 앞면이 되고 앞쪽의 대문 쪽은 뒷면이 된다. 따라서 대청과 마루는 양재가 있는 내삼문 쪽으로 개방되는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11단성향교 출입문인 관선문, 명륜당 대청 아래의 통로, 동재와 서재 등이 조화를 이룬 채 옛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륜당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내삼문의 지붕도 이와 비슷하다. 내삼문 안에는 대성전이 있는데, 대성전 앞 양쪽으로 양무 대신 전사청과 제기고의 역할을 하는 두 건물을 둔 점도 특이하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장경고에는 ‘단성현 호적장부’(도유형문화재 제39호)가 보관되어 있는데, 당시의 인구 구성과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다시 문승열 전교는 단성민란의 역사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한다.

현청이 있었던 단성의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은 단성향교뿐이다. 단성은 1862년 농민항쟁의 시발지로 유서 깊은 곳이며, 농민들이 환곡(양곡 대여) 등의 폐단에 저항하여 집단봉기를 한 곳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단성민란은 임술년 농민항쟁의 서곡으로, 진주농민항쟁 등 전국의 5개 도 37개소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삼정(三政)의 문란, 특히 환곡의 폐단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단성향교 향회를 중심으로 뜻을 모아 거사를 한 것이다.
(정창교)20150922-600년역사단성사직제12밖에서 본 명륜당 뒤쪽, 누각 형식으로 지어진 명륜당, 뒤쪽에 있는 내삼문, 구리고 그 뒤쪽 사당인 대성전 등이 자리하고 있어, 단성향교가 임술년 농민항쟁의 시발지로 유서 깊은 옛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단성지역에 환곡이 늘어난 것은 관리들의 조직적인 수탈행위 때문이었다. 지방 관리들의 횡포에 대한 단성주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은 1861년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중앙관리 출신인 김인섭(김령의 아들)은 감사와 현감에게 읍폐의 교정을 건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임현감 임병묵이 다시 횡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흥분한 사족과 농민들이 마침내 관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사족 대표들이 감영에 소장을 올리기로 결정한다. 김령 등이 대구의 감영을 찾아 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단성현감 임병묵은 곡식을 단성민에게 돌려주라는 감영의 명령을 거역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단성민들은 단성향교의 향회를 열고 본격적인 투쟁을 준비한다. 농민들로부터 구타 수모를 당하던 현감이 달아나면서 관리들이 흩어지자 사족들이 고을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들은 매일 향회를 열고, 좌수와 이방을 선출하는 등 행정체계를 정비해 나갔다.

단성의 행정을 장악한 사족들은 계속 환곡의 폐단 해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환곡 등의 폐단에 대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항쟁을 주도한 이들에게 처벌을 내린 것이다. 단성농민항쟁은 진주농민항쟁을 비롯하여 임술민란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큰 의미를 띤다.

임술년 농민항쟁은 단성에 이어 바로 이웃한 수곡장터와 덕산 등 지리산 자락에서 들불처럼 계속 번져나게 된다. 진주농민항쟁도 지리산의 수곡장터와 덕산에서 본격적인 기치를 올리게 된다. 훗날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지리산 기슭 하동은 호남지방과 조직적으로 연대했고, 진주 일대도 그 횃불을 이어받아 계속 번져나가 역사의 이정표를 남겼다.

이리하여 단성사직단과 단성향교는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간직되어 있는 향토문화재이다. ‘유서 깊은 고을 단성면에 한 번쯤 들러 역사문화재를 접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면 얼마나 보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자꾸만 스쳐간다.

7기_정창교

600년 역사 아로새겨진 단성사직제 봉행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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