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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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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장군과 여의 낭자의 러브스토리가 봉황대에 머물다

온라인 명예기자단 조윤희

조윤희 

 

바람의 길에도 방향이 있을까 싶을 만큼 멋진 구름이 하늘을 유영하는 겨울의 하루를 김해의 문화재로 지정된 봉황대 일대에서 보내시면 어떨까요?


코비드 경계 속에서 그나마 안심하고 산책할 만한 곳, 봉황대를 찾았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른 잔디였던 곳이 누런 옷으로 바꿔 입고는 겨울이라 하네요.


혹시 차를 갖고 오시는 분은 김해도서관 맞은편 주차장을 이용하시면 된답니다. 주차를 하고 봉황대 유적지 초입에 들어서면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아이와 뛰어놀거나 대규모 야외 행사를 진행하기에 아주 좋은 김해 봉황대 공원이 있답니다.

 

 

봉황동 유적의 발굴과 정비에 대한 안내판이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기에 내용을 옮겨봅니다.

 

"이곳은 가야문화 환경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가야인 생활 체험존 조성을 위하여 2001.10.8~2003.10.11  경남발전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하였다.


그 결과  본  유적일대는 고대의 항구가 입지하기에  적합한 지질환경으로서 가야시대의  농경지, 토기가마, 기둥구멍  등의 유구와 함께 당시 교역 관련 창고 시설로 추정되는 굴립주 건물들이 대규모로 발굴되고 있어 이 일대가 당시 해안가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고상가옥 3채와 망루 1채를 복원하고, 가야 시대의 배를 제작 및 설치하였으며 당시의 식생을 고려한 유적환경을 조성함으로서 금관가야 시대의 생활 모습과 자연환경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 주물로 제작한 것으로, 복원된 기마상은 창을 든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도 철제 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함께 들려주는 것 같았답니다.
또 화려한 금동제의 말장식과 섬세한 말갖춤새는 가야 기마무사의 위상과 고도로 발달한 가야 문화를 모두 상징하고 있답니다.


금방이라도 봉황대 일원을 힘차게 달릴 것 같은 무사상이어요.

 

 

봉황동 유적지에서 고상건물지와 가야시대 집모양 토기를 참고하여 복원한 고상가옥이 가야시대에는 바다였을 포구 너머 보이네요. 열대우림 지역에서나 볼 것 같은 고상가옥은 우리나라 가야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가옥 형태래요.

 

 

가야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을 가야인의 무대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듯 높은 건물들이 저만치 보이니 이 또한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네요.

 

 

가야포구 재현지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철거된 전망 데크와 목선이 설치되었던 시간을 잠시 회상해 보네요. 그때처럼 못 위에 데크와 목선이 새로이 설치되면 좋겠다 싶은 일인입니다.

 

 

윗지방은 눈이 온다는데 이곳 김해의 하늘은 몰려다니는 구름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보기 좋았어요. 더군다나 옛날 바다였던 곳을 재현한 연못의 수면에 반영된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감성을 돋우는 데 일조를 하네요.

 

 

순환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고상가옥을 만나게 된답니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는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이 만든 건축물로서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답니다.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이 만든 건축물인지라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높기 때문에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답니다.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로서
외부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일종의 시설물인데, 이 망루는 가야시대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 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m이랍니다.


망루 앞에 보이는 큰 길은 좌측은 주차장 있는 곳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방향은 망루 앞을 지나 봉황대, 패총 박물관쪽으로 갈 수 있는 데 패총은 다음 기회에... 봉황재로 가볼까요?

 

 

길가에 선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봉황대 순환로를 걸으면서 그 키와 빽빽함 두께에 새삼 놀라게 된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래동화도 떠올라 미소짓게 되더군요.

 

 

가락국(금관가야)의 역사는 서기 42년 수로왕의 즉위로부터 시작해 530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함에 따라 역사의 전면에서 자취를 감추기까지 드문드문이지만 삼한시대부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인근에서 호안석, 접안시설, 수상가옥지, 토루(土壘) 등이 최근 조사되어 이 유적은 금관가야 읍락의 중심지로 추정되며 그중  '수혈주거'는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인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로서 여기에 복원되어 있는 수혈주거지는 '봉황리' 진입 소방도로 내 유적지 제 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 복원된 것이라고 해요.


 

황세 바위 오르는 길목에 있는 여의각의 모습이 봉황대 구릉 정상부에 가까울수록 그 모습을 드러내네요. 가락국 말기 출정승의 딸 ‘여의’와 황정승의 아들 ‘세’의 애틋한 전설과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출여의와 황세의 애틋한 전설을 기리고자 만든 사당인 여의각 가는 비탈에 돌계단을 만들어 두어서 예전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답니다.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전설을 들려 드릴게요.


가락국 제9대 겸지왕 때 남대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는데 이후 황정승은 아들 세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대요.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를 하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에서 멱을 감게 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습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오게 되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고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 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며 외동딸인 유민 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습니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 당한 여의 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 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게 되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편 황세 장군과 혼인을 했던 유민 공주는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두 몸이 한 몸처럼 끌어안고 있는 연리지 나무가 여의각 바로 앞에 있어서 그런지 두 남녀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것 같이 다가오더군요. 

 

 

봉황대 정상부 가는 계단을 따라 산책나온 시민의 모습을 담아보았어요. 정상부에 막상 오르면 별 특이한 것도 없고 좀 큼지막한 바위들만 여러개 놓여 있답니다.


동남쪽으로는 회현리 패총이 있는 구릉과 연결되어 있으며, 옛날부터 가라대(伽羅臺), 망해대(望海臺), 여의현(如意峴), 독현(獨峴), 회현(會峴) 등으로 불려 오고 있으며, 가락국 숙왕시대때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 그리고 '섬섬과 해선 아씨'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한 봉황대 둘러보기 하다가 한숨 돌린 곳이기도 한 곳이랍니다.

 

 

정상부에서 황세바위를 향해 바라보면 넓은 평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기이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답니다. 여의소원목(여의환생목)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한 몸인데 가지가 툭 튀어나갔다가 다시 본 몸통에 붙어 생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인가 봐요.

 

 

황세는 가락국 9대 임금 겸지왕(숙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인데요. 남자인 줄 알고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을 이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이곳 황세바위에서라네요.

 

 

가락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일컬어지는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 사이에 얽힌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 '황세 바위' 사이를 지나면서 전설따라 바람 한 줌 지나갑니다.


 

아버지인 숙왕의 욕심때문에 불가항력에 의해 '황세장군과 여의낭자'를 사별하게 만들고 사랑없는 결혼했으나 이내 황세와의 사별 후 비구니가 된 유민공주의 삶 역시 불운했을테죠. 젊은 청춘의 슬픈 인연을 뒤로 하고 천제단 쪽을 돌아 슬슬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하려고 걸음을 옮기네요.

 

 

'가락국 천제단 (駕洛國 天祭壇)'이라는 표지석이 황세바위 뒷편으로 내려가면 구릉 위에 넓은 평지가 나오고 끝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던 터로 원래의 사직단은 정방형 하단 위에 원형의 원단이 있었던 구조였으나, 가야시대의 유적지구임에도 불구하고 평평하게 밀어버린 점이 아쉬웠네요.

 

 

산책 시작할 무렵의 화창한 하늘과 달리 점점 무겁게 보이는 하늘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아 걸음을 서둘러 봅니다.


가락국의 왕궁터와 천제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는 설과 가야시대의 무역항이자 왕국의 정원이었던 곳이었으며, 원래 이름은 '망해대' 였지만, 조선 고종 때 부사 정현석이 이곳의 모습이 봉황을 닮았다 하여 '봉황대'로 불린 곳에서 김해 시내를 바라봅니다.


반백년을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김해의 모습이 하루하루의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내일을 그리며 봉황대의 산책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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