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왕궁지로 생각되는 가 야 동(작은 개애재 지역)은 1921년경 함안 둘안 제방(堤防)을 축조할 때 일본인들이 인근의 대문천(大門川)의 수로를 변경시키기 위해 새로운 제방을 만들면서 이 곳 구릉의 흙을 약 2m 이상 파내어 마을 앞 제방을 쌓았는데 이로 인해 이 곳의 지형 자체가 변형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노인들에 의하면 옛 가 야 동 자좌오행(子坐午行)의 자리가7) 왕궁지라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266번지의 안성 덕씨 집에는 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돌이 있는데, 잘 다듬어진 사각형의 화강암으로 건물의 초석(礎石)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4조각으로 나누어져서 집안의 구석에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데 그 중 한 조각은 절구로 제작되어 사용하고 있다.
추측컨대 이 초석은 일제 시대에 제방 축조시 발견되어 이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부주의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훼손된 것 같다. 또한, 기록에 나타나 있는 토축(土築)의 흔적이 지금도 마을 앞의 보리밭에 확연히 남아 있으나, 약 30여m 정도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어서 아쉬운 감이 든다. 그리고 아라국시대의 우물(井)로 전하는 곳이 두 곳 있으나 한 곳은 매몰되었으나, 한 곳은 현존한다.
성 안의 여러 곳에서 가야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가야 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짐작된다. 아라가야국이 서기 1세기 경 연맹 왕국으로 성립하여 6세기 중엽 멸망될 때까지 약 500여 년간 함안 지방을 중심지로 하여 번영을 계속한 바, 왕궁이 어느 한 곳에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가야.동 266번지 일대가 가장 유력시되고 있으며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도 상당하였으라 짐작된다.
서기 520년을 전후한 시기에 김해 지방의 남가라(南加羅), 밀양 영산 지방의 탁기탄국(啄己呑國)이 신라에 병합되자 가야 연맹의 맹주이면서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아라국(阿羅國)은 남부 지역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정치적 합의체를 결성하려고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아라국은 새로이 높은 집(高堂)을 지어 백제, 신라, 왜(倭)의 사신을 초빙하는 국제회의를 아라국에서 두 차례나 열어 이 회의를 주관하면서 가야 연맹의 부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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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