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 번호 : 국보 제33호
1914년 2월 창녕 초등학교 학생이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에 소풍갔다가 목마산성 서쪽 기슭의 밭속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교사에게 알려오게 되고 일본 교장의 보고에 의하여 동경제대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 시대 비석임을 확인하고 학계에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24년 지금의 자리인 창녕읍 교상리로 옮겨 오면서 일본식의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6.25 이후 다시 한국식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62cm, 너비는 174cm, 두께는 30∼51cm이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겼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다.
비문은 해서 (楷書)체이며 글자의 지름은 4cm, 각 행마다 27∼18자씩 모두 27행 643자 이다. 그런데 비문의 전반부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맨 처음에 신사(辛 巳)라는 간지가 있기 때문에 561년(진흥왕22)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題名)이 보이지 않으나,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의 명단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전반부는 판독이 힘들기는 하지만, 확인되는 글자와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의 경우를 통해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대략 신라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比斯伐)가야를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강토를 개척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하여 내외의 고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한 해가 대가야의 멸망 불과 1년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는 가야지역에 대한 정치적 선무(宣撫)의 성격을 띠고 있다. 555년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가야지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진흥왕의 창녕순수 역시 기존의 토착 세력을 선무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문의 후반부는 글자가 비교적 명료하여 판독하기가 쉬운데, 왕을 수행한 신료들을 중앙 행정관·지방 군정관·지방 행정관·시종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신료들은 각기 관직명·출신 지역명·인명·관등명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관직명과 출신 지역명이 앞 사람과 똑같은 경우에는 생략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비문의 후반부를 통해 지방 행정조직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즉, 정복한 지역을 네 개로 분할하여 통치하고, 각기 최고 군정관인 군주를 두는 사방군주제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울러 군주제가 시행되어 통일신라시대 9주제도의 기본이 이미 6세기 중엽에 완성되어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주·군까지는 중앙의 귀족이 파견되었으나, 그보다 밑에 있는 촌락행정은 그 지방의 유력자에게 위임하여 종래의 공동체적 성격이 온존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신라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의 관제·신분제·사회조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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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