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 번호 : 문화재 제254호
의령군 용덕면(龍德面) 죽전리(竹田里) 504번지에 있는 태암 서원(泰巖書院)은 두문동 (杜門洞) 72현(賢)의 한 분인 문원공(文元公) 전조생(田趙生)과 그의 손(孫) 회정(晦亭) 전자수(田子壽)를 향사(享祀)하기 위해 1789년(正祖13년)에 유림(儒林)과 담양 전 씨 (潭陽田氏)후손들이 건립하고, 1820년(純祖20년) 유림(儒林)에서 사액(賜額)을 청한 서원(書院)이나 1868년(高宗5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철(廢撤)되었다가 그 뒤 다시 중건하였다.
2백여 평의 대지에 정면 6간 2작 측면 2간의 강당(講堂)과 3간의 별묘(別廟)가 있으며 별묘에는 문원공(文元公)의 영정을 봉안하고 두 분의 문집(文集) 등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 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 말 정일(丁日)과 10월 10일 춘추(春秋) 2회에 결쳐 유림(儒林)에 의한 향사(享祀)가 봉행된다. 문원공(文元公) 조생(趙生)의 자(字)는 계경(季耕), 호(號)를 경은(耕隱)이라 하니 고려 말(高麗末)의 공신으로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진 전득시(田得時)의 7세손(世孫)이다.
위로 야은(野隱) 록생(祿生) 래은(來隱) 귀생(貴生)의 두 분 형님이 있었으며 3형제가 모두 고려(高麗)에 출사(出仕)하여 명성을 얻으니 세상에서는 이들 3형제를 일러 삼은(三隱)이라 하였다.
그는 찬성첨의부사(贊成僉議府事)에 이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왕으로부터 두 왕자를 부탁받고 정학(正學)에 공헌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할 때 불사이군(不仕二君)의 대절(大節)을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72현(賢)가운데 한 분이다.
(家世相傳何物業 李仁忠義禮廉節)의 계자시(誡子詩) 한편과 시문집(詩文集)이 전해 온다.(潭陽田氏世鑑) 또 함께 배향(配享)된 전자수(田自壽)는 문원공(文元公) 조생(祖生)의 손(孫)으로 자(字)는 백인(伯仁) 호(號)를 회정(晦亭) 또는 월호(月湖)라 하였다. 그는 일찌기 벼슬에 난가 광정대부첨의평리(匡靖大夫僉議評里)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으며 오늘날 몇권의 문집(文集)이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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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