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제90호(74.2.16)이다. 창건 연대는 알수 없으며 신라시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시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은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하므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었고 지방관리가 정무를 보면서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심신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종조이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이 곳의 군수로 부임하여 있을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토록 하여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되는 요인이 된곳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관가와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숙종18년(1692)에 군수 정무 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수정
1910년 이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함양초등학교의 교실, 군립도서관등으로 이용되던 것을 197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규모는 정면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8작 지붕 목조와가로 되어있다.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었고, 지방관리가 정무를 보면서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심신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 목조기와 건물로 되어 있다.
학사루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최종수정일 :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