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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광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의 파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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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se 코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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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계절사계절
  • 추천일정1102
  • 여행유형체험
  • 지역고성군
  • 관리기관055-674-1222 / 010-8854-2141
  • 문의전화055-674-1222
  • 편의시설
    장애인편의시설 놀이시설 수유실 유모차 자전거 와이파이

상세내용

이 고택은 밀양 박씨의 옛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대대로 진사와 효자가 태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이 집에서 효자 박효근이 출생하였고, 그의 아들 박한회와 손자가 진사를 지냈다. 밀성(밀양) 박씨인 이 집안이 고성에 터를 잡은 때는 300년 전으로, 선조들은 대대로 용인에 살았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하기 위하여 함안으로 내려와 숨어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 대규모로 고쳐 지은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2동, 곳간채 2동,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택의 품위를 잘 보여준다. 방문객이 제일 먼저 접하는 집 대문 위에는 이 가문의 효자 박효근을 칭송하고자 내린 효자정려 현판이 붙어 있어 집안의 내력을 보여준다. 정려는 국가에서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으로 신라 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이 정려를 받은 가문은 이를 대대로 집안의 영광으로 여겼고 마을의 자랑으로 칭송받았다. 효자 박효근의 효행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박효근의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살리려고 단지(斷指)를 해서 피를 입에 넣는 등 극진히 남편을 섬겼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슬픔에 산소에 가서 울다가 지쳐 기절했다. 박효근은 산소에 기절해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살리려 애를 썼고 이때 산삼을 발견한 박효근이 씹어 어머니에게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 사실이 동네와 조정에 알려져서 효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집안 안주인의 거처인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부엌, 방, 대청, 갓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동쪽에 담장을 둘러 별당처럼 안사랑채를 배치하였고 중문간채를 바깥사랑채로 이용하였다. 중문에서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도록 담장을 둘렀다. 집 주위로는 전체적으로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데 기와조각을 섞어 모양을 내었다. 일제강점기 때 다시 고쳐 실용성과 전통성이 잘 조화된 전통한옥인 이 가옥은 조선 후기 건축의 변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택의 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집안의 선조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데 누군가 한강나루에서 죽으려 하고 있었다 한다. 선조가 그 연유를 물으니 ‘집안에 빚이 있는데 그 빚을 갚을 여력이 안 되니 빚 대신 딸을 내 놓으라고 해서 죽음으로 그 수모를 면하려 한다’ 하였다. 선조는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과거를 보기위해 지니고 있던 노잣돈을 다 내어주고 진주(당시 고성은 진주목에 해당)에 사는 박생원이라는 것만 밝히고 내려왔다 한다. 후에 그 집안의 자손이 풍수지리를 공부하였는데, 물어물어 이곳까지 내려와 지세가 좋은 지금의 위치에 집터를 잡아 주었다 한다. 그리고 고택 밖에 위치한 마을 우물은 진해 천자봉의 지하수맥과 연결되어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우물의 물맛이 좋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과거 이 고택에는 많은 고서 등이 있었는데 몇 번 도난을 당하고 현재는 지정문화재를 비롯해 대부분의 고서 등을 경상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안에서는 대대로 차를 즐겼다고 하는데, 현재는 중사랑채를 개조해 다실로 꾸며놓고 숙박하거나 방문하는 이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 저작물은 자유이용을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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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 문화관광체육국 관광진흥과  
  • 연락처 : 055-211-4611

최종수정일 :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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