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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군

    우륵

    문화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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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의 삶과 생애
    ‘악성(樂聖)’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본래 ‘악지성인(樂之聖人)’의 줄임말이다. 음악의 성인이라 이를 만한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이다. 가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을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이라 부른다. 언제, 누가 이들에게 ‘악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그러한 호칭에 걸 맞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우륵은 가실왕이 만든 가야금의 음악을 만들고 지켜냈으며,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들었고, 박연은 세종 때 음악을 정비하여 조선 전기의 음악을 일정한 수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 모두가 시대를 달리하여 태어났지만 음악 분야에 정통한 인물 즉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들이 악성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재능과 투철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륵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탄생, 성장과정, 음악적 업적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삼국사기』에 단편적으로 실린 기록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가야 성열현(의령 신반) 출신 우륵에 대한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과 가실왕의 요청에 의한 우륵 12곡 작곡,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 망명, 신라에 대한 가야금과 그 음곡의 전수, 가야금과 그 음곡의 신라대악 채택 등으로 요약된다. 즉 전체적으로 우륵의 삶과 생애를 살펴 볼 자료로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소략하여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잡지(악) 가야금조의 ‘羅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省熱縣 출신의 악사로서 가야국 가실왕의 명에 의하여 諸國의 方言을 하나의 ‘聲音’으로 통일하기 위해 가야금 음곡 12곡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국 가실왕은 열두 달의 음률을 본 따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열두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의탁해 왔으며 그 악기 이름이 가야금이다.’라고 적고 있다. 우륵의 신라 망명이후의 행적 역시 『삼국사기』 잡지(악)와 신라본기에만 단편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우륵이 신라에 의탁해 오자 진흥왕은 국원에 안치하고, 곧이어 낭성에 순수하여 가궁인 하림궁에서 우륵과 제자 이문을 불러 ‘新歌’를 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진흥왕은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전 낭성(娘城)에서 들었던 음과 다름이 없다.” 하고는 상을 후하게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앞서 살펴본 우륵의 출신지와 『삼국사기』에 전하는 단편적인 우륵관련 사료를 근거로 우륵의 삶과 생애를 유추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륵은 가야국의 궁정악사로 성열현(의령)에서 태어났으며 , 가야의 가실왕과 신라의 진흥왕 (재위 540~576)과 동시대 인물이다 . 당시 가야국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연맹을 맺고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는데 , 나라의 어려운 운명을 감지한 악사 우륵은 대가야가 진흥왕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인 550년경을 전후로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 이에 신라 진흥왕은 우륵을 지금의 충주지역인 국원에 안치시키고 세 명의 신라 귀족들을 보내어 가무악을 전수받게 하였다. 제자들에 대한 악곡 전수 과정에서 우륵이 단지 가야금의 악사만이 아니고 가무악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종합예술인 이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세 제자의 재능에 따라서 각자의 전공을 정해주고 학습을 시켰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신라 17관등 중 열 번째 관등인 대나마 법지에게는 노래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그리고 열두 번째 관등인 대사 만덕에게는 춤을 전수하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 관료들이었던 우륵의 제자들은 우륵에게 전수 받은 12곡을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스승의 동의 없이 5곡으로 개작하여 연주해서 우륵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우륵이 막상 그들이 개작한 음악을 듣고는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애처롭지만 슬프지 않으니 과연 올바른 음악이다.’ 라고 말하며 당시 음악에 있어서도 공자의 예악사상인 중용의 도를 철학적 근거로 삼고 있음을 상기하며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인다.

     

    상술하였듯이 우륵은 생몰 연대를 알 수가 없고 대가야의 악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신라 망명 이후의 행적도 국원에 안치된 것 말고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기록된 사료에 살을 더 붙여 우륵의 삶을 더듬어 보자면 우륵은 경남 의령 지역의 가야출신으로 5세기 4/4분기에 태어나서 6세기 1/4분기에 후기가야의 맹주국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우륵 12곡을 제작한다. 그러다가 고향인 의령지역에서 일찍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지역의 신라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친신라 성향을 띠었던 우륵은 후기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가 이뇌왕 시절인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은지 7년만인 529년에 ‘신라의 변복’ 문제로 결혼동맹이 결렬 되면서 친백제․ 반신라 정책을 취하자 자신의 입지와 역할이 좁혀졌고 이에 가야금을 가지고 제자 이문과 함께 조국 의령을 떠나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우륵이 신라로 망명한 시기는 사료를 참고하면 540년에서 551년 3월 이전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을 당시 신라의 왕은 진흥왕이었다. 망명이후 우륵에 대한 신라가 취한 예우는 조국 가야지역에서의 우륵의 위상에는 걸맞지 않은 듯하다. 진흥왕이 우륵을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아닌 국원인 충주에 안치한 점이라든지 우륵에게 가야금과 그 음악적 재능을 전수 받은 제자들이 우륵 12곡을 ‘번거롭고 음란하여 아담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면서 스승 우륵과의 사전 상의도 없이 5곡으로 줄이는 무례를 범하는 점 등에서 가야 악사 우륵에 대한 신라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륵은 처음에는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가야의 망명객으로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의 음악적 이상의 맥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까닭에 우륵의 정치적 망명은 꼭 성공적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음악가로서 우륵의 선택은 성공적 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우륵은 562년 가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후 560년대 어느 시점에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륵은 가야(의령) 사람이었지만 온전한 가야인으로서는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또 정치`외교적으로 친신라 노선을 견지해 신라 망명을 선택했지만 신라인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륵은 가야와 신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적 음악적 재능은 신라에 의해 계승되어 1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민족의 음악으로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우륵은 가야금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제국, 가야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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