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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라 치러진 각종 전국사격대회에서 창원시청 사격팀이 좋은 성적을 냈다. 고맙게도 메달 수상 소식은 창원시청 사격팀 관계자가 현장에서 SNS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당시 받은 문자메시지에서 '김민지 조용성 커플 스키트 동반 금메달'이라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조용성(30)은 국가대표로 런던 올림픽, 도하 아시안게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바 있다. 지난해 전국체전에서는 2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김민지(27)는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한 이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개인·단체전에서 각각 은메달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개인전 금메달과 단체전 은메달을 딴 정상급 선수다. 또 두 사람은 이번 충남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에 한팀으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했다.두 선수는 오는 11월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의 결혼.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창원시청 선수들의 계속되는 출전 일정 사이에 어렵게 약속을 정해 그들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어떻게 만나 사귀게 됐나요. 프러포즈는?김민지: 고등학교 때부터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그때부터 쭉 알고 지냈어요. 합숙훈련부터 각종 국외 대회 출전까지 다니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죠. 그런데 오빠가 계속해서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면서 친한 척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저에게 관심은 있는데 표현을 못 해 그런 것이라고 하더군요. 2009년인가 제가 신종플루에 감염돼 격리조치 됐어요. 그런데 감염 걱정도 안 하고 저를 챙겨주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음이 끌렸죠. 프러포즈는 오빠가 지난 연말 호텔에서 촛불, 꽃장식, 풍선 장식 해놓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고는 제가 먼저 감동받아 울어버리면서 오빠도 울고 저도 울고…. 오빠가 울면서 '나랑 결혼해 줘'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안주머니에 있는 반지를 못 빼서 손만 덜덜 떨더군요.창원시청 사격팀 조용성(왼쪽)·김민지 선수. 두 선수는 오는 11월 백년가약을 맺는다.사격 선수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데요.조용성: 사격뿐 아니라 다른 종목도 선수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격에서는 창원시청 김종현 선수가 저희보다 몇 주 앞에 사격선수 출신과 결혼하고, 창원시청 팀에 또 다른 선수는 저희보다 한 주 뒤에 결혼합니다. 이 선수도 역시 사격 커플입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면서 서로 잘 알고 또 잘 이해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같이 합숙하고 훈련하면 얼굴도 더 많이 보고 가족만큼 가까워지죠. 오히려 집에 가면 더 어색할 때가 많아요. 같은 분야여서 공통분모도 많고 서로 힘들 때 도와주고 의지하고 그러면서 사랑이 싹트는 것 같아요.사격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조용성: 저희 아버지는 창원시청 조현진 감독입니다. 할아버지도 사격인 출신이고요. 저는 아버지 따라 사격장을 많이 다녔지만 총을 잡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그때 총을 한 번 쏴봤는데 잘 맞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시작을 했어요. 마산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격장과 가까운 문성고로 전학을 가서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사격장 가서 아버지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습니다. 체계적이었지만 늦게 시작한 탓에 정말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한창 방황할 시기라 그때는 힘들어서 정말 후회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덕에 금방 대표 선수로 뽑혔습니다. 이후 경남대를 졸업하고 창원시청에 입단했죠.김민지: 저는 안산이 고향인데 저도 아빠 영향으로 사격을 시작했어요. 아빠가 엘리트 선수는 아니었고 생활체육으로 늦게 사격을 했는데 꽤 잘하셨어요. 뒤늦게 사격을 접해 좋은 선수가 못됐던 것이 후회였나 봐요. 저에게 사격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어요. 아니 강요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했어요. 저도 오빠처럼 정말 아빠가 혹독하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켰어요.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저도 후회 없어요. 성적도 그럭저럭 나오고 또 오빠도 만나고….조용성 선수.아이들도 사격을 시킬 건가요?조용성: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아이는 두 명 정도 낳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사격인 집안이라 아이들이 자질이 있다면 밀어줘야죠. 그런데 딸은 사격을 시킬 생각이지만 아들은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진종오 선배가 하는 권총과 소총 종목은 우리나라가 강세지만 클레이는 아직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그나마 우리나라 여자 스키트는 알아주지만 남자 스키트는 아직 차이가 크죠. 그래서 어려운 길이라는 걸 잘 알기에 고민입니다.대부분 스키트에 대해 생소해 하나요?김민지: 사격은 장총으로 산탄을 쏘는 크레이사격과 권총, 소총 등 한발씩 쏘는 분야로 나뉩니다. 클레이사격은 또 트랩과 드블트랩, 스키트로 구분됩니다. 트랩·드블트랩은 어깨에 총을 대고 기다리다 아래쪽에서 나오는 접시를 맞추는 방식이에요. 스키트는 총을 들로 있다 양쪽에서 나오는 접시를 따라가며 맞추는 방식인데 자리를 옮겨가며 쏘고요. 트랩은 지구력과 근력이 더 많이 필요해서 주로 덩치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스키트는 체형이 좀 호리호리하면서 순발력과 민첩성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합니다.김민지 선수.부부로서 선수로서 서로 평가하면 어떨까요.조용성: 당연히 민지가 더 훌륭한 선수죠. 저희는 정말 성격이 확실히 다른데 서로 잘 맞습니다. 저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못 내도 그냥 쉽게 잊고 흘려버립니다. 반대로 민지는 지고는 못사는 성격입니다. 제가 민지를 만나면서 배운 점이 끈기와 승부 근성입니다. 그래서 경기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게 됐고요. 경기가 끝나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미숙했던 점을 개선하고 보완하게 됐습니다. 민지는 반대로 제게서 참을성과 여유를 배웠다고 합니다. 민지는 경기에서 지면 분을 못 이겨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고 해야 하나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좀처럼 남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스트레스도 심했을 것이고…. 그런데 이제는 남을 인정하면서 상대의 좋은 점도 배우고 스스로와 남을 대하는 여유도 찾았어요. 저희는 사귀고 서로 그런 모습을 배우면서 성적이 계속 올랐어요. 또 부부가 되면 저희는 24시간 같이 있게 되죠. 공통분모가 많아 소통도 잘되고 서로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들어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반대로 싸우고 사이가 안 좋아지면 서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쭉 참고 배려하며 살려고요. 허허. 아무튼 사격선수로서 동반자로서 모자라는 부분을 서로 채워주고 사랑하면서 성장하겠습니다. 후배들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요.선수로서 앞으로 꿈과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조용성: 우선 2018년 창원세계사격선수권대회, 2018년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2020년 도쿄 올림픽에 계속 출전해서 좋은 성적 내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스스로 만족할 만큼 열심히 훈련한 적이 없어요. 조금 하다가 겉으로 맴돌고 그랬는데…. 이제 결혼해 안정과 여유를 찾게 되면 정말 후회 없이 훈련에 몰입하려고요. 그래서 좋은 성적 내서 민지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사격은 비교적 늦은 나이까지 할 수 있는 종목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 남자 스키트 실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일조하고 싶습니다. 또 계속 관리 잘해서 두 사람 모두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도 꿈꿔봅니다. 허허.
16.11.23.'딸기'라는 여성이 한때 성인인터넷방송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오프라인 팬 미팅까지 열릴 정도였다. 물론 팬층은 99.9% 남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딸기'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팬들은 경찰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담당 경찰관들 이메일 주소를 찾아 협박성 내용을 담아 보냈다. 그들의 원망 대상 가운데 한 명이 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테러수사팀장 송재용(48) 경감이다.Porno 여배우 검거 '협박 쇄도'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내 테러수사팀은 올해 2월 신설됐다. 침해형 범죄, 즉 해킹·바이러스 등과 같은 전문적인 영역을 다룬다.최근 10대 등 3명이 피시방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을 하는 일이 있었다. 해킹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어난 범죄였다."200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각종 해킹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사이버 전쟁'이라 할 정도로 충격과 파급력이 커졌죠. 얼핏 보면 비슷한 정보유출, 디도스 공격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미세한 수법 차이가 있습니다. 나날이 진화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들 생각을 한 번 더 뒤집는 역발상을 끊임없이 합니다. 한 발 더 앞서나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거죠. 엄청난 머리싸움이 필요합니다. 첩보가 들어오면 팀원들이 모여 '너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는 회의를 반복합니다."송 경감은 '사이버수사 1세대'로 이쪽 분야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동안 해결했던 굵직한 사건들은 나열하기 벅찰 정도다.송재용 사이버수사대 테러수사팀장 경감.'전국 최초 인터넷성인방송국 운영자 검거 등 음란물 배포 피의자 74명 무더기 검거', '제16대 대통령선거 사이버 선거사범 4명 구속', '인터넷 700서비스 이용 음란정보 제공 벤처기업 대표 등 22명 검거', '인터넷 이용 50억 원 상당 불법 신용카드대출 피의자 4명 검거', '인터넷 국제마약밀매조직 20명 구속', 'P2P 사이트 음란물 유포자 34명 검거'….2004년 '국제 인터넷Porno방송국 운영자 등 72명 검거' 때 유명인사(?) '딸기'가 포함됐다."2000년 초 인터넷 활성화로 성인비디오 업계가 Porno방송국 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애초 국내에 세트장을 만들어 놓고 찍는 식이었는데, 단속이 시작되자 외국으로 옮겨갑니다. 잘 나가던 여배우는 한 달 수입만 3000만 원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딸기'를 검거했을 때는 테러성 메일을 엄청나게 받았죠. 이후 사이트 운영자들에게 '딸기를 구속한 경찰관'으로 소문이 났습니다."이러한 성과 때문에 지금도 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뜨면 관련 업계가 바짝 긴장한다고 한다.'승진 명당' 부서로 이끌다테러수사팀은 송재용 경감을 비롯해 5명으로 구성해 있다. IT 기업체에서 일하다 특채로 들어온 수사관도 2명이나 된다.이들은 지난 5월 이른바 '몸캠피싱' 사건을 해결했다. 스마트폰으로 음란행위를 유도한 후 해킹프로그램으로 개인 정보를 확보,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수법이었다. 20여 명이 저마다 역할 분담을 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우리가 애초 파악한 인원은 3명이었습니다. 근거지가 서울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승합차 두 대를 몰고 갔습니다. 오후 6시 조금 지나 급습했는데 20명 가까이 안에 있는 겁니다. 알고 보니 24시간 2교대로 운영하는 식이었는데, 마침 교대 시간이라 모두 모여 있었던 겁니다. 예상외로 사람도 많고 압수물도 엄청났습니다. 차 2대에 꽉꽉 채워 겨우 경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수사 영역은 전국 혹은 국외 할 것 없다. 결국에는 검거가 목적이기에 전국 곳곳을 다녀야 한다. 며칠 씩 외박은 기본이다. '몸캠피싱' 사건만 하더라도 서울을 대여섯 차례 오갔다. 근거지를 확보했다고 해도 무턱대고 문을 따고 들어갈 수 없다. 증거물 확보 가능한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수사관 스스로들 '사이버 전사'라 부르는데, 그 앞에 '인내가 필요한'이라는 말 또한 빼놓지 않는다.송재용 사이버수사대 테러수사팀장 경감.이처럼 몸과 머리가 함께 고된 일이다. 대부분 사건은 고소인도 없어 백지상태에서 범죄 단서를 찾아가야 한다. 통신 허가, 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 것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조직 내에서 기피 부서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만큼의 결과물도 뒤따랐다.송 경감은 '2004년 총선 인터넷 비방 사범 검거' 유공으로 경사로 특진했고, 2005년 '기업형 음란화면채팅 운영단 86명 검거'로 다시 1년 만에 경위로 특진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사이버치안 대상'으로 경감으로 역시 특진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수사관들이 1년 사이 모두 특진하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사이버수사 부서는 곧 승진 명당'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장본인이다.독학으로 컴퓨터 전문가 우뚝송재용 경감은 의경 복무를 계기로 1991년 경찰관이 되었다. 타자로 조서를 꾸미던 시절이었다. 경찰서 내 컴퓨터는 수사과 1대, 경무과 1대 정도였다. 송 경감은 수사지원팀 업무를 하면서 컴퓨터 편리함을 잘 알았다. 컴퓨터 대리점 하는 지인을 통해 '한글 문서프로그램'을 익혔다. 그리고 조립식 컴퓨터를 사비로 사서 업무용으로 활용했다."저를 보고 주변 선배들도 컴퓨터를 하나씩 사기 시작하더라고요. 하지만 관련 문서 서식이 없다 보니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관련 서식 500여 개를 한글 파일로 만들어 나눠줬죠. 그런데 이제는 한글 문서작성 방법이 서툴다 보니까, 문제 있을 때마다 저를 찾는 겁니다.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는 이가 많으니 보람이야 말할 수 없었죠."송재용 사이버수사대 테러수사팀장 경감.송 경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컴퓨터를 좀 더 전문적으로 익혀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정보통신 기능사 자격증, 인터넷검색사, 각종 프로그램 자격증을 땄다. 독학으로 컴퓨터 전문가 길에 접어든 것이다.2000년 경남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반이 신설되면서 지금의 업무에 본격적으로 발 들였다. 중간에 형사과 업무 등을 제외하면 어느덧 12년 넘게 사이버수사 업무를 이어오고 있다. 평소 '아픔 없이 얻는 것도 없다'는 좌우명을 바탕으로 미개척 분야에 도전, 사이버 전문 수사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한 분야 전문가' 이야길 듣지만, 스스로는 '팔방미인' 소릴 듣고 싶어 한다. 이래저래 욕심 많은 송 경감이다.사이버범죄 법률자문 봉사 꿈진주가 고향인 송재용 경감은 은행에서 근무하던 아내를 만나 1996년 결혼했다. 당시 서무 업무 때문에 은행갈 일이 잦았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2000년 진주 근무 때 내 집 마련에 성공했는데, 한 달 만에 창원으로 발령 났다. 이후 6년간 진주 집에서 창원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지금은 창원에 별도 주거지를 마련해 주말 부부로 지내고 있다.1남 1녀 가운데 고3 딸은 어릴 때부터 경찰 제복·용품에 반하면서 아빠 뒤를 잇겠다고 벼르고 있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시험 보겠다는 딸과, 그래도 대학에 적을 두면서 준비하라는 아빠 간 알콩달콩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사이버수사 업무는 아무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특히 불법 사이트는 야간에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집에서도 인터넷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송 경감은 한때 살이 엄청나게 불었는데, 테니스를 10년 가까이 치면서 그 고민에서 벗어났다. 특히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라 일석이조다.송 경감은 컴퓨터를 붙들고 있었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며 감회에 젖는다."1990년대에 PC통신 속 파란 화면에 빠져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납니다. MS-DOS, 286컴퓨터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변천사를 모두 경험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퇴직까지는 아직 10년 넘게 남았다. 남은 시간, 그리고 이후 할 일에 대해서도 머릿속에 그려놓은 게 많다."백지상태에서 밤새워 가며 추적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이피라는 숫자가 나오고, 결국에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매력에 빠져 지금껏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 내 어둠의 세력들을 찾아내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죠. 그러기 위해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겁니다. 사이버수사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컴퓨터 지식만 있다면 끊임없이 연구해 가면 됩니다. 제가 습득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보급·전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이후에는 사이버범죄 법률 자문 봉사단체에서 활동해 보고픈 꿈이 있습니다."
16.11.15.호흡을 가다듬었다. 캔버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긴장감이 돌았다. 몸을 숙여 듬뿍 풀어놓은 색색의 아크릴물감에 붓을 가져다 대나 싶더니, 호흡을 멈추고 붓과 몸을 하나로 움직였다. 일순간 캔버스에 흔적이 남았다. 붓이 옮겨간 결, 그리고 순간적으로 튕긴 물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최행숙(59) 작가의 작업 모습이다. 작가의 일순간의 행위가 작업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짧은 시간 작가의 감각과 우연이 만들어내는 작품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저 '휘리릭' 붓을 긋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 고도의 집중을 통해 붓이 제 결을 캔버스에 자연스레 맡기게 한다. 일필휘지. 한 번의 움직임이 정적인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모든 작업이 마찬가지이듯, 한순간에 절정에 이르는 법은 없다. 붓을 한 터치 옮겨 놓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시간에 캔버스에 풀어놓은 작업이 모두 작품이 되지도 않는다. 온전히 작가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한 작품은 그 자리에서 폐기된다. 짧은 시간의 빠른 판단으로 캔버스에 사용한 물감을 걷어낸다.최행숙 작가.대형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두고 큰 붓 3개를 붙여서 자체 제작한 붓을 들고 작가는 작품 완성을 위해 온종일 노동을 한다. 붓과 몸이 하나가 돼야 하는 작업이기에 더 많은 노동이 든다. 최행숙 작가를 만나고자 찾은 창원 사파동의 지하 작업실에서 작가는 팔에 기다란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종일 커다란 붓을 붙들고 작업을 하다 보면 온몸이 쑤십니다. 특히 팔이 많이 아픈데요. 병원에 가면 작업을 그만두라고 권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웃음)"작가의 창작 활동은 작업실이 말해주고 있다. 작업실 한쪽에는 완성한 작품이 빼곡히 쌓여 있고, 작업을 하는 공간에는 바닥, 의자, 가구 등 곳곳에 물감이 튄 흔적이 있다.몸을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는 '액션 페인팅'은 실제로 힘이 많이 들기에 여성 작가보다는 남성 작가들이 많은 편이다. 각종 행사에서 퍼포먼스로 작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 작가는 퍼포먼스 요청이 많았지만, 마음과 몸을 다잡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아직 응한 적은 없다고 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작업이기에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100호는 기본이고, 200호, 300호의 대형 작업은 온몸을 움직여서 그리다 보니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작가 스스로 '행복하게, 아름답게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힘든 그림'이라고 말할 정도다.최행숙 작가는 지난 2014년부터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해오고 있다. 선명한 오방색을 캔버스에 칠해놓고 있다. 오랫동안 '활력(Vitality)'을 주제로 모노크롬(단색화) 작업을 하던 작가는 3년 전 국악 밀양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다 아리랑 작품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아크릴이라는 서양 물성에 한국의 전통색상인 오방색을 결합해 현대회화와 전통을 동시에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전 작품인 검정 등을 이용한 모노크롬 작업을 한 지 6년 만이다.최행숙 작가."작품 속 아리랑은 한반도의 수많은 침탈과 일제 강점기 겨레가 토해냈던 한의 소리가 아닙니다. 겨레 스스로 한을 떨쳐 일어나는 깨달음의 희열과 신명의 춤사위를 큰 붓의 일필로 그으며 강렬함을 더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합니다."작품 '아리랑'을 저작권 등록도 했다."아리랑을 소재로 한 일반적인 시각 디자인이나 음악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회화에 아리랑을 접목한 시도와 과정, 그 결과는 없습니다. 그래서 2015년 11월 아리랑 작품을 저작권 등록까지 했습니다."작가는 창작의 성실함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길도 모색했다. 공연 속에 자신의 작품 아리랑을 접목하는 방법도 찾았다. 아리랑 공연 무대에 자신의 아리랑 작품이 함께 하면 공연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도는 성과를 냈다. 올해 6월 울산에서 공연 무대 배경에 자신의 작품 아리랑을 사용했다. 갤러리 '아리오소' 개관 5주년 기념 콘서트 아리랑에서 국악,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 무대에 작가의 대형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과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게 공연은 준비됐다. 대형 크기의 작품은 공연 무대에서 대형 빔프로젝터로 무대마다 작품을 달리하며 연주와 어우러졌다. 물감이 요동치는 듯한 생동감 있는 작품은 연주와 함께 흐르고 움직였다.그림 작업을 하는 최행숙 작가.공연무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컬래버레이션도 추진됐다. 조만간 출시될 한 음료 회사의 병 라벨에 자신의 작품을 결합한 것이다. 전통주, 건강기능 음료 등을 만드는 '우포의아침㈜'과 독일 바이에른주 상공협회 아시아 최초 독일 티 소믈리에가 운영하는 카페 '티엘츠'가 함께 만든 '루이보스&오렌지 티' 병에 작가의 작품을 프린트해서 부착하게 됐다. 티엘츠 측에서 연락이 와서 함께 하게 됐다고 했다. 올해 1월 '단색화의 거장' 이우환 화백이 국제적 명성을 지닌 1등급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2013년산 라벨을 컬래버레이션해서 선보인 작품도 봐 온 터였다. 차 음료와 최 작가의 작품은 절묘하게 어울렸다.KBS 노래자랑 무대 배경에도 최 작가의 작품을 활용한 그림이 오르기도 했다."제 그림은 장사익 가수의 노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창도 아니고 클래식도 아닌 독특함이 있어요. 제 그림은 어찌 보면 문인화 같지만, 서양화의 물성을 이용한 정신적인 그림입니다."최 작가는 대중에게 알려진 모노크롬, 아리랑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지금까지 해온 작가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구상, 비구상, 평면, 설치 작품을 소품, 콜라주 형태 등으로 두루 보여준다. 작업실 입구에 의자에 앉아 있는 곱슬머리 사람 작품은 인상적이다. 구리와 철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작가는 "부지런히 많이 움직이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면, 좋은 그림을 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최행숙 작가.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고성 출신인 작가는 여고시절 미술교사도 없는 시골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던 작가는 대학 미술 사생대회에 입상하면서 부산의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됐다고 했다. 대학에서 유화 그림을 처음 그렸다고 한다. 유화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기름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몰라 주유소를 찾아가는 해프닝도 있었을 정도다.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미술학원을 열었다. 아이를 키운 후 차츰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치열한 작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어느덧 그런 세월이 20년이 훌쩍 지났다.올해 최 작가는 전시가 유독 많다. 개인전이 경남을 비롯해 서울 등에서 6회나 계획됐다. 전시는 대부분 마무리됐다. 현재 서울 크라운해태 1층 쿠오리아갤러리에서 '회화 아리랑(Vitality of Arirang)' 전시를 열고 있다.작가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겠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기획이 안 됩니다. 내년에는 내년의 색이 있을 거에요.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정진해야죠.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걸음을 멈추고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16.11.09.'무릇 시란 정신의 핏빛 요철이므로/장님도 더듬으며 읽을 수 있어야 하리/집 나간 영혼을 부르는/성소의 권능으로.// 얽힌 말의 실타래 같은/이미지의 굴레 같은/ 그 터널을 절뚝거리며/ 내 독자는 걸어왔구나/ 그러나 양파 속이여/아 드러날/허방이여.'이우걸(70) 시조 시인의 '시'라는 시조다.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2009년, 천년의시작)에서 발표했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어느덧 시력(詩歷) 40년이 훌쩍 지났다. 시가 켜켜이 쌓여갈수록 시인은 자신의 시를 되돌아봤다.이우걸 시조시인.시인은 <지금은 누군가 와서>, <빈 배에 앉아>, <네 사람의 얼굴>, <저녁 이미지>, <사전을 뒤적이며>, <아직은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 <맹인>, <아직도 거기 있다>, <처음에는 당신이 나의 소금인 줄 알았습니다> 등 시집 20여 권을 냈다. 부단히 시조를 썼고, 인정도 받았다. 정운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중앙시조대상, 한국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남문인협회 회장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 문인단체인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지난 8월 생존한 시조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창녕군 이방면 '㈔푸른우포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우걸문학관'이다. 생존한 시조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은 '백수문학관'에 이어 두 번째일 정도로 흔치 않다. 창녕에서 생태 환경 교육을 하는 20년가량 된 시민단체인 푸른우포사람들은 김승옥 소설가와 정채봉 동화작가를 기리는 순천만의 순천문학관처럼 자연과 문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고향이 창녕인 이우걸 시인이 푸른우포사람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우포늪에 문학관이 만들어지게 됐다. 기존에 푸른우포사람들이 사용하던 공간을 문학관으로 꾸몄다. 생태교육장, 시조 문학관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다. 넓지 않은 공간에 시인의 활동 사항, 시조집 등을 전시하고, 건물 꼭대기 층에는 자그마한 집필실이 마련됐다. 우포늪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다.이우걸 시조시인.시인에게 시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이우걸 시인은 문학관 개관식 때 형님 두 분에게 자신이 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공을 돌렸다. 다부진 체격에 까맣게 탄 형들은 아우의 문학관 개관식에 그렇게 소개됐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우걸 시인은 가장 큰 형과는 15살이나 차이가 난다. 형들은 남동생 중 막내인 시인에게 아버지 역할을 했다. 대학 등록금도 형들이 농사지어 마련했기에 막내인 이우걸 시인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법고시를 준비해 빚을 갚고자 했다. 하지만, 인생이 꼭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는 법. 제대를 하고 복학한 농과대 친구가 수필을 읽어주며 "네 인생을 살라"고 한 말이 깊이 각인됐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글짓기를 하고팠다. <현대시조>라는 책을 읽고, 불현듯 시조를 썼다. '엽서', '코 고무신' 두 편이다. 대학 학보사 투고함에 시조를 써서 냈다. 2주 뒤 학보에 투고한 시 2편이 게재되면서 시인은 시조 시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우걸 시인은 "당시 김춘수 선생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김춘수 선생은 학보 문예란 평을 했는데, 나를 '복현 문단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내 글을 보고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자랑이 아닐 수 없다'고 썼다. 그때 감동이 컸다. 한동안 그 글을 늘 오려서 자랑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시인의 첫걸음을 뗐다. 이우걸 시인은 김춘수 시인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이후 대학교 2학년 때 <월간문학>에 글을 내서 당선이 됐다. 이때 이영도 시조시인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이영도 시인은 이 시인에게 <월간문학>이 아니라 <현대시학>으로 등단하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월간문학>을 포기하고 1973년 2월, 4월, 10월호 <현대시학>에 이영도 선생의 3회 추천으로 등단했다. 이 시인은 "이영도 선생에게 글을 보여드리면, 선을 그어서 되돌려줬다. 말을 아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들유들하고 화려했던 내 시조가 이영도 선생께 배우고 나서 '다이어트' 됐다"고 말했다.이우걸 시조시인.이렇듯 김춘수, 이영도 시인이 시조 시인의 길라잡이를 했다면, 시인의 어머니는 시의 원천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 혼자서 6남매를 키웠다. 해방 후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이우걸 시인과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시인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의 부탁으로 형님들의 국어책에 있는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서 드리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심곡, 불경, 가사, 시조 등을 외면서, 힘을 얻곤 했다는 것. 그 모습을 지켜본 시인에게 시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시인이 된 아들에게 "네게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면 네 인생의 길이니 뒤돌아보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달려가라"고 격려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시인은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를 적었다.'아직도 내 사랑의/주거래 은행이다/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대출받다가/대출받다가/갚다가….'시인 스스로 "프로필을 보면, 빈 시간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시인의 이력은 빼곡하다. 긴 시간 시를 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시인은 초창기 시조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대학 시절 주변에서 나를 많이 골렸다. 다들 자유시를 쓰는데, 많은 말들을 어떻게 시조 형식에 맞춰서 넣으려고 하느냐고 놀렸다"고 했다. 자유시도 함께 써야 할지, 시조만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는 자유시도 포함돼 있다. 3번째 시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유시가 한 편도 안 들어가고 시조만 담게 됐다. 시인은 "민족이 강해지려면 민족의 시가 강해져야 한다. 전통성을 가진 정형시를 토대로 한 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지금까지 써 온 시조만 450여 편. 자유시 50여 편을 합하면 5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렇게 많은 시 가운데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시는 무엇일까. 시인은 '팽이', '비누', '단풍물', '사무실', '비' 등을 꼽았다. '팽이', '비누' 등은 현실 비판적인 시다. 특히, '팽이'는 대학 시절 시위를 하면서 적었다고 했다.이우걸 시조시인.'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시 전문)이우걸 시인은 창원 웅남중 등 창원, 김해 지역 5개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했다. 시비도 2곳에 설치됐다. 화엄사 앞에 윤판기 서예가의 글씨로 '모란' 시비가 있고, 경북 청도에 '팽이' 시비도 있다.시인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동네 서점에 가서 시집 5권씩 사서 읽고 있다고 했다. 리듬이 차 있으면, 내용을 접목해서 시를 적는다. 시인은 원고지, 노트에 자신이 적은 시조를 외다가 타이핑을 해서 시조를 완성한다.김상옥의 '봉선화', 이영도의 '단란', 정완영의 '달과 나무', 이호우의 '바람벌' 등을 좋아하는 시인은 앞으로 새로운 시 세계를 펼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이우걸 시조시인.시인의 시는 처음에는 '가락지', '이슬' 등의 시에서 보여준 것처럼 전통 서정을 중시했다. 작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을 시조의 형식을 잘 살려서 감동을 전하고자 했다. 이후 <사전을 뒤적이며>, <저녁 이미지>, <맹인> 등의 시조집에서 보여주듯이 시대성, 현장성을 담았다. 최근에는 '바퀴는 돌면서', '안경' 등의 더욱 짧아진 '단시조'를 통해 짧은 말 속에 시공을 초월한 노래를 담아내고자 노력해왔다.최근 우포늪에 문학관을 겸한 집필실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시조를 꾀하고자 한다. 이우걸 시인은 '뉴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인은 "휴머니즘이란 신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을 찾는 운동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구가 파괴됐다. 우포에 있으니, 자연과 인간이 함께 잘 살길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 환경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뉴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혔다.그는 "아름다운 늪과 이곳에서 사는 동식물을 살피며 내 시조의 지평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길 기원한다"고 전했다.시인은 현재 <서정과 현실> 대표,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명예 이사장, 세종학숙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16.10.31."픽미 픽미 픽미업∼♬."올 시즌 창원 마산구장에서 열리는 NC다이노스의 홈경기 7회말이 끝나면 어김없이 노랫소리와 함께 선글라스를 낀 5명의 남자가 드래그매트(그라운드 정비 도구)를 끌고 그라운드에 등장한다. 3루 내야에서 시작해 1루 쪽으로 이동한 이들은 도구를 손에서 놓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진다.이들은 마산구장의 '그라운드 키퍼'다. 올 시즌 시범경기부터 시작한 그라운드 키퍼 공연은 야구장에 한 번 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마산구장의 명물이다.공연 덕에 유명해졌지만 이들의 주된 업무는 선수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그라운드와 잔디를 관리하는 일이다.그라운드 키퍼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자 그라운드 반장 이영진(49) 씨를 지난 13일 만났다.포스트시즌을 앞두고 NC다이노스 선수들이 한창 훈련 중인 마산구장에서 그라운드 키퍼 이영진 반장을 만났다.-반갑습니다. 언제부터 그라운드 키퍼를 하게 됐나요?"2013년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 퇴직하고 일을 구하고 있었는데 야구장 관리업체에서 낸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당시 저를 포함해 그라운드 키퍼는 4명이었는데 저를 뺀 3명이 모두 60대 초반이었어요. 그라운드 관리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경력이 긴 그분들에게 많이 배웠죠."-그라운드 키퍼의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오후 6시 30분 경기를 기준으로 오후 1시에 출근합니다. 그라운드에 떨어진 이물질을 치우고 청소를 하지요. 청소가 끝나면 선수들 훈련 준비를 합니다. 훈련 장비와 그물망을 세팅해둡니다. 오후 4시 30분쯤 홈팀 선수 훈련이 끝나면 일부 장비를 회수합니다. 이때부터는 원정팀 선수들이 훈련을 하죠. 원정팀 훈련이 끝나면 경기 시작 10분 전까지 파울라인을 긋고 배트박스를 그립니다. 그리고 내야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고 흙이 파인 부분이 있으면 새 흙으로 메웁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경기 전에 하는 일입니다."경기 중 그라운드 클리닝 타임 때 드래그매트를 끌면서 흙을 고르고 있는 그라운드 키퍼들. /NC다이노스-경기 중에는 어떤 일을 하나요?"보통 3·5·7회말이 끝나고 그라운드 정비를 합니다. 하지만 1회라도 경기 시간이 길어져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많이 밟아 상태가 나빠지면 그때도 정비합니다. 5회말에는 정비 시간이 4분이지만 나머지 이닝에는 1분 20초 만에 이 일을 모두 끝내야 해요. 촉박합니다. (경기가 끝나면 곧장 퇴근하나요?) 아닙니다. 경기가 끝나면 또 내일 경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운드와 배트박스에 새 흙을 뿌려 다집니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면 밤 12시에서 1시쯤 됩니다."-올 시즌부터 마산구장에 천연잔디를 깔았습니다. 관리하기에 여간 신경이 쓰일 것 같지 않은데요."잔디 관리는 김남용(47) 팀장이 맡고 있습니다. 김 팀장은 우리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잔디를 깎습니다."옆에서 이야기 듣던 김 팀장은 "축구장 잔디와 달리 야구장 잔디는 매일 깎아야 합니다. (김 팀장은 축구경기장 잔디 관리 업무를 했었다) 잔디가 길면 공이 잘 구르지 않고 멈춰버리거든요. 그래서 내야는 2.5㎝, 외야 잔디는 2.8㎝ 정도로 길이를 일정하게 유지해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잔디 관리가 가장 어려울 때는 언제인가요?"(김 팀장 답변)여름 장마철이 가장 힘들어요. 비 오면 대형 방수포로 내야를 덮습니다. 잔디는 열기에 취약하거든요. 여름철 방수포 아래 온도는 70도를 훌쩍 넘깁니다. 사람도 그 안에서는 질식할 정도이니 잔디는 금방 짓무릅니다. 열기를 빼주고자 일정한 간격으로 블로어로 바람을 넣어 식힙니다. 밤새 두 명씩 당직을 서서 관리하기도 합니다. 특히 올 시즌에는 마산 경기에 우천 취소가 많았잖아요.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7회말 그라운드 클리닝 타임 때 음악에 맞춰 공연을 하고 있는 그라운드 키퍼들. 맨 오른쪽이 이영진 반장이다. /NC다이노스-그라운드 키퍼 공연이 화제입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NC 구단에서 먼저 제안해왔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이벤트를 벤치마킹해 우리도 해보자고 했죠. 처음에는 내가 이런 것까지 하면서 일을 해야 하나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우리 공연을 본 관중이 매우 즐거워하시고 호응해주셔서 이제는 쑥스러움도 없고 많이 익숙해졌습니다."-춤 연습은 언제 하나요?"경기 끝나고 그라운드 정비 마친 뒤에 합니다. NC 구단 응원단원 중 한 명이 와서 가르쳐줍니다. 지금까지 '마초맨', '픽미', '비트 잇' 등 7곡을 했는데 일주일 전에 새로운 곡을 알려주면 동료와 짬짬이 호흡을 맞춥니다. 드래그매트를 끌다가 춤을 춰야 하는데 처음에는 타이밍 잡기가 어려웠어요. (본인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가장 뒷사람이 접니다. 허허."-NC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있습니다. 응원 메시지 전해주시죠."정규시즌에 NC가 홈경기에서 승리하면 그라운드를 잘 닦아놓은 덕에 이긴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질 때는 서운하기도 하죠. NC 선수들이 부상당하지 않고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서 꼭 우승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한 시즌 고생한 것에 보상받는 것 아니겠어요. 반드시 한국시리즈 우승하세요. 파이팅!"
16.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