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군 칠원면에 있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은 고고한 선비의 철학이 한 자리에 담겨있는 곳이다.
풍욕루와 하환정이 있어 조선 선비의 절개와 높은 기상이 살아있고 연못 국담(菊潭)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주재성(周宰成, 1681~1743)의 도의가 드러나 있다. 주재성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우고 풍기에서 최초로 인삼을 재배한 주세붕의 후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마다하고 학문수행에만 전념했는데 무기연당 곳곳에 그 높은 뜻이 배여 있다.
풍욕루(風浴樓)에 몸 씻고
굴원(屈原)은 뛰어난 학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초나라 왕족의 후예로 제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쯔강 이남으로 추방되었다. 호숫가에서 어부를 만난 그는 "어부가 어찌 초라하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세상 사람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대중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 홀로 취하지 않았으니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했다.
어부는 "성인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능란하게 세상의 추이에 응한다. 혼탁하면 같이 혼탁하고 취했으면 같이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에게 말했다.
이에 굴원이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떨어서 입는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라고 하면서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세속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면서 웃고 사라졌다고 한다. 풍욕은 바람에 몸을 씻는다는 것이니 곧 몸을 씻은 굴원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며 바람에 몸을 씻어 선비의 고고함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환정(何換亭)서 은둔의 삶 노래
엄광(嚴光)은 후한 광무제의 죽마고우로서 높은 학식이 있었으나 광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거해 낚시를 즐기다 죽었다.
그래도 광무제가 계속 간청해 한번은 궁궐에 들게 되었는데 대전까지 걸어 올라가 이게 얼마 만인가하면서 하대하였다. 광무제가 친구와 정을 풀고자 한다며 신하를 물리고 밤늦게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엄광이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후인이 이에 시를 지었다.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만사 생각 없고 다만 낚시대라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삼공벼슬에도 이 강산을 놓을 소냐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평생에 잘못 본 유문숙 때문에
惹起虛名萬世間 (야기허명만세간)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졌구나.
후에 삼공불환차강산은 4대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당쟁에 시달리던 조선시대 선비의 은둔과 절개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는데 어찌 놓겠느냐고 반문하는 하환 역시 어사 박문수의 천거에도 벼슬길을 마다한 뜻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작가 미상의 하환정도(何換亭圖)가 남아있다.
국담(菊潭)엔 하늘과 땅을 담아
하환정 중수기에 의하면 국담(菊潭)은 1717년에 만들어졌는데 마당에 연못을 파고 고기를 기르는 곳이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주재성이 의병 200명을 모아 대구로 가자 관찰사 황선이 감동해 관군 3000명을 주어 분치령(分峙嶺, 남원과 함양의 고개)에서 적을 막게 했는데 전장에 식량이 떨어지자 가산을 털어 백미 300석을 사서 배불리 먹이니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관군과 의병이 이에 보답코자 돌아가는 길에 마을 입구에 정충비를 세우고 연못 안에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다음, 이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으며 담장을 쌓고 영귀문(詠歸門)을 내었다. 주재성이 이에 국담으로 호를 삼고 거기서 용학강의(庸學講義), 경의집록(經義輯錄), 거가요범(居家要範) 등의 저서를 지으며 유유자적했으니 그 호방함이야말로 평범함을 벗어나는 것이다.
무기연당은 1984년 12월 24일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후기 연못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원문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대대로 살던 주씨 고가도 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조정래 함안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