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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경남역사

[아하! 경남역사]사천 학생 독립운동 이야기

113일은 올해로 92주년을 맞이하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어린 학생들이 일제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싸워 독립을 외친 날이다. 19193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경남에서도 다양한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그중 사천 학생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사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김을성(77) 소장을 만났다.

배해귀  사진 김정민

 

 

313일 사천 최초, 곤양공립보통학교에서 만세 시위

19193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의거 함성은 열흘이 지나 사천지역까지 도달했다. 김 소장은 당시 313일 밤 10시쯤, 김진곤은 곤양공립보통학교의 기숙사를 찾아가 학생들을 설득하여 하얀 종이에 태극기를 그렸어요. 그리고 그 뒷면에는 독립만세라는 글자를 굵직하게 새겼죠. 그렇게 만든 태극기를 당시의 주재소(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 설치된 경찰기구)에 투척했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과 함께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했고, 이후 46일과 19일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곤양 장날에 모인 사람들과 힘을 합쳐 독립만세를 외쳤다.

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초등학교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거지요. 당시 학생들이 어른들의 귀감이 된 셈이죠. 그리고 비록 규모가 작았지만 곤양공립보통학교의 만세 시위는 사천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웠답니다.”

 

3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 날 축구 첫 골 나오자 대한 독립 만세

1919321. 이날은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등학교)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황순주와 박기현, 김종철이 졸업반이었던 당시 14살 이윤조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어요. 이윤조가 다른 학생들을 설득했고, 만세시위 준비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죠.”

이들은 태극기 200여 매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졸업식이 있는 321일을 만세시위 날로 잡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펼쳐지는 축구 경기에서 첫 골이 터지면 만세시위를 하자고 약속했다.

당시 축구 경기는 돼지 오줌보를 공으로 만들어 차고 놀았던 경기로 졸업생과 재학생이 편을 나누어 경기를 했어요. 축구 경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골이 나왔고, 이윤조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태극기를 몰래 전달받은 학부모와 졸업생, 구경 온 군중들도 함께 동참해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학생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교문을 뛰쳐나갔고, 읍민들과 합세하여 거리를 행진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수백여 명의 학생들에게 태극기가 전달되고, 만세시위를 전개한다고 알렸어도 끝까지 탄로가 나지 않았어요. 그만큼 학생들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사천 헌병대의 긴급 출동으로 사람들이 끌려갔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윤조 등 학생들도 체포되었다.

    

사천초등학교, 2001년부터 만세 시위 재현 행사

사천초등학교에서는 사천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01년부터 매년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를 연다. 시가행진, 퍼포먼스와 함께 학생들이 주도하는 역할극, 학예회 활동 등도 함께 진행한다

또한 사천읍성 수양공원에는 사천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독립정신과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는 사천 3·1의거 기적비1969년에 설치됐다.

 

김 소장은 사천의 항일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일제는 어린 학생들도 가차 없이 체포했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후유증으로 힘들어했습니다. 젊은 청춘들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싸웠고 그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독립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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